< 검은 깃발 흰 그림자 -아나키스트가 두고 간 새벽 >

김영천
2023-04-21



< 검은 깃발 흰 그림자 -아나키스트가 두고 간 새벽 >



 

                                      김 영 천(金永千)


검붉은 동쪽 하늘이 

숨죽이며 다가오고,

눈 쌓인 산허리에

보랏빛 바람이 일었다.

그의 발걸음이 무거워질수록

발자국마다 핏물이 고였다.


몇 개의 솔방울이 

한 줌의 눈 무게를 못 이겨 뛰어내렸다.

다리 부러진 장끼 곁에서 

까투리가 종종걸음으로 맴을 돌고 있었다.


저 아래 판잣집

헤진 루핑 지붕,

점점이 희끗거리는 눈 위로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낮은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고,

혼불 셋이 

구멍 난 창호지 앞에서 

홀홀 너울거렸다.


지난 밤 마지막 식빵,

허기진 아이들은 

달게

아주 달게 먹어주었다.


아버지가 오늘도 식빵 사왔네.

어머니는 언제 오시나,

보고 싶은데

아기가 자꾸만 울어서 울어서.


초등학교 일학년,

큰 아들 일기에

빵 부스러기가 굴러다녔다.

작은 아들 썰매 모자는

귀 밑 색동 실이 풀어져 내렸는데,

두 살 된 딸아이 품에서

장난감 바람개비가 

쿨럭쿨럭 쉬지 않고 돌았다.


손가락 꼽던 설날은

뒷산 산마루를 못 넘고 조각났다.

그 파편에 찔린 피눈물이,

녹슨 양철 물지게에 

고드름 길게 매달렸다.


빵 내밀며 등 돌린 아비는

살 한 조각 뼈 한 토막까지 발린

돌장승,

철거민촌 마을 입구 

목 잘린 돌미륵이었다.


밀기울 한 됫박에

머리카락 자르고,

어미는 먼 길 떠났다.

백 날 천 날

식모살이로 시퍼렇게 밤낮을 새웠다.


흙 벽 무너져 내리는

움막집을 팔았다.

헤진 이불과 옷가지도 팔았다.

그예 귀 떨어진 솥단지

숟가락 젓가락마저 팔았다.


오늘 아침,

남김없이

남루한 몸뚱이까지 

모두 가져가라고 했다.

빌려 온 연탄 한 장도

이제 하얗게 재가 되었다.


동지들,

그때는 우리 모두

태양 하나씩 안고서

검은 먹색 윤기 흐르며 빛났지.

묵란(墨蘭) 치고 격문(檄文) 쓰던 안사람도

보름달마냥 휘황(輝煌)했거든.


함께 애써 되찾은 나라,

땀 흘리며 

일곱 빛깔 곱게 빚어내던 나라는

없네.

지금 없네.


더 이상 

숨 쉬어지지 않는 걸.

뼈 마디 마디 육탈되어

발바닥을 송곳이 뚫는군.

심장 저며 내어 아리네.


울지 마시오 동지들,

송홧가루 흩날릴 때

꼭 다시 오리니.

보라색 붓꽃 무리지어 

환하게 어깨 걸고 달려올지니.


가지 꺾인 소나무에서

눈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름 잊힌 혁명 하나가 쓰러졌다.

그가 두고 간 새벽,

살가죽 벗겨져 내린

검은 깃발이

하얗고 또 하얗게

긴 그림자로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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