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아카데미
한국자주인연맹
(08793)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1956, 302호 | 1956, Nambusunhwan-ro, Gwanak-gu, Seoul, Republic of Korea
TEL : 02-838-5296 | 관리자메일 : kaone@kao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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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은 깃발 흰 그림자 -아나키스트가 두고 간 새벽 >
김 영 천(金永千)
검붉은 동쪽 하늘이
숨죽이며 다가오고,
눈 쌓인 산허리에
보랏빛 바람이 일었다.
그의 발걸음이 무거워질수록
발자국마다 핏물이 고였다.
몇 개의 솔방울이
한 줌의 눈 무게를 못 이겨 뛰어내렸다.
다리 부러진 장끼 곁에서
까투리가 종종걸음으로 맴을 돌고 있었다.
저 아래 판잣집
헤진 루핑 지붕,
점점이 희끗거리는 눈 위로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낮은 굴뚝에는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고,
혼불 셋이
구멍 난 창호지 앞에서
홀홀 너울거렸다.
지난 밤 마지막 식빵,
허기진 아이들은
달게
아주 달게 먹어주었다.
아버지가 오늘도 식빵 사왔네.
어머니는 언제 오시나,
보고 싶은데
아기가 자꾸만 울어서 울어서.
초등학교 일학년,
큰 아들 일기에
빵 부스러기가 굴러다녔다.
작은 아들 썰매 모자는
귀 밑 색동 실이 풀어져 내렸는데,
두 살 된 딸아이 품에서
장난감 바람개비가
쿨럭쿨럭 쉬지 않고 돌았다.
손가락 꼽던 설날은
뒷산 산마루를 못 넘고 조각났다.
그 파편에 찔린 피눈물이,
녹슨 양철 물지게에
고드름 길게 매달렸다.
빵 내밀며 등 돌린 아비는
살 한 조각 뼈 한 토막까지 발린
돌장승,
철거민촌 마을 입구
목 잘린 돌미륵이었다.
밀기울 한 됫박에
머리카락 자르고,
어미는 먼 길 떠났다.
백 날 천 날
식모살이로 시퍼렇게 밤낮을 새웠다.
흙 벽 무너져 내리는
움막집을 팔았다.
헤진 이불과 옷가지도 팔았다.
그예 귀 떨어진 솥단지
숟가락 젓가락마저 팔았다.
오늘 아침,
남김없이
남루한 몸뚱이까지
모두 가져가라고 했다.
빌려 온 연탄 한 장도
이제 하얗게 재가 되었다.
동지들,
그때는 우리 모두
태양 하나씩 안고서
검은 먹색 윤기 흐르며 빛났지.
묵란(墨蘭) 치고 격문(檄文) 쓰던 안사람도
보름달마냥 휘황(輝煌)했거든.
함께 애써 되찾은 나라,
땀 흘리며
일곱 빛깔 곱게 빚어내던 나라는
없네.
지금 없네.
더 이상
숨 쉬어지지 않는 걸.
뼈 마디 마디 육탈되어
발바닥을 송곳이 뚫는군.
심장 저며 내어 아리네.
울지 마시오 동지들,
송홧가루 흩날릴 때
꼭 다시 오리니.
보라색 붓꽃 무리지어
환하게 어깨 걸고 달려올지니.
가지 꺾인 소나무에서
눈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름 잊힌 혁명 하나가 쓰러졌다.
그가 두고 간 새벽,
살가죽 벗겨져 내린
검은 깃발이
하얗고 또 하얗게
긴 그림자로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