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와 연민, 세상과 우주 만물에 대한 따스한 시선-고영민의 시세계 『사슴공원에서』(2012)
박정희(朴貞熙)
작품은 시인의 내면적인 풍경이다. 그가 생각했던 지향점, 그의 정신세계, 그가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짐작해 보려한다. 그는 우수와 연민, 세상에 대한 따뜻한 감성을 가지고, 그가 애정을 가진 사물의 세계를 통해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시를 쓰기 위한 그의 관찰은 세밀하면서도 따뜻하고 공감각적이다. 즉 폴발레리와 구상 시인이 강조한 사물에 대한 우주적 감각과 우주적 연민이다. 「마중」, 「동행」, 「원두」, 「극치」를 통하여 그의 시세계를 살펴본다.
그의 시 「마중」에서는 그가 겪었던 죽음에 대한 기억들, 삶의 곡절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젊은 날 죽음을 맞이한 형이 그립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아버지가 형을 데리고 저승에서 지금 이곳에 나타나 줄 것만 같은 환영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형이 다시 저 산 길로 살아왔으면 좋겠다” 이 한마디로 그리움과 아픔과 기대감이 함께 버무려져 슬픈지 아픈지 괴로운지 뒤섞여져 간절한 소망으로 매달린다. 여기에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먼저 떠난 형을 떠메고 올 것만 같은 희망에 그리움은 더욱 밀려온다. 그래서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다시 저 길로 살아서 왔으면 좋겠다/죽은 아들을 살려 떠메고/함께 웃으면서 왔으면 좋겠다”라고 허공중에 되뇌인다.
먼저 아들을 보낸 아버지는 더욱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가슴앓이를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 그 아버지의 깊은 슬픔을 지켜보았던 남아있는 아들은 오늘 더욱 가슴이 저린다. 아버지의 멍이 된 형, 그 아들을 만나려 먼저 떠난 아버지, 남은 자는 떠난 자의 환생을 꿈꾼다. 꽃처럼, 그리고 꽃처럼 환하게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들은 다시 살아서 온다/달큰한 아버지의 술냄새처럼/꽃들은 온다/비틀비틀 온다/산 절로 물 절로, 흥얼흥얼 고래고래/노래를 부르며 온다”(「마중」 일부).
또한 고영민의 시선은 돌멩이, 그림자,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등의 소외되고 외로운 삶의 아픈 곳들을 찾아 간다. 「동행」에서 길가에 하찮게 나뒹구는 돌멩이,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는 돌멩이,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로 걷어 차 버리는 돌멩이에게도 미안하고 안타까운 시선을 쏟는다.
“길가 돌멩이 하나를 골라/발로 차면서 왔다/저만치 차놓고 다가가 다시 멀리 차면서 왔다/먼길을 한달음에 왔다...책임 못 질 돌멩이를/집 앞까지 데려왔다”(「동행」 일부).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돌멩이 덕분에 나는 지루하지 않게 집에까지 잘 왔지만, 돌멩이에게는 너무 무심했다. 생각 없이 무심코 한 행동을 반성한다. 돌멩이이기에, 영혼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마음을 열고 보니 책임도 질 수 없는 일을 덥석 저지르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아프게 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 따뜻한 배려가 생겼다. 우주만물과 소통하는 삶의 진지함이 묻어난다.
이러한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은 「원두」에서도 엿보인다. “원두를 넣고 물을 부어/커피를 내린다” 커피 한잔을 마시려 한다. 그리고 이 커피를 건네준 커피나무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뉘와 같이 이 커피를 마실까 고민해 본다. 생각난 사람들 중에는 평소 그가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들이 생각난다. 소외된 곳, 외로운 곳이다. 외국인 노동자, 아픈 이들이다. 같이 커피를 나누며 아프지 않은 세상을 나주고 싶은 것이다.
“올 봄 당신은 저 나무에게서/몇 잔의 뜨겁고 진한 꽃나무 밑으로/외국인 노동자 몇 명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지나갔다...전동휠체어를 탄 뇌성마비 여자가/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미끄러지듯 지나갔다”(「원두」 일부)
고영민은 우주만물의 뜨거운 열정을 사랑한다. 「극치」에서 개미와 소의 부지런한 열정을 우체부의 하루일과를 통하여 바라본다. 이로써 인간뿐만이 아니라 미물과 동물들에게도 자기 일에 심취하며 살아가는 것들에게 애정어린 찬사를 남긴다.
“개미가 흙을 물어와/하루종일 둑방을 쌓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길게 몇 번을 우는 것” “어스름 저녘/고갯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우체부가 밭둑을 질러/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극치」 일부).
금낭화, 잠자리, 마른솔잎, 산그림자까지도 그것들만의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우주만물과 어우러져 순회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에 공감한다. “금낭화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보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노랗게 쌓여 있는 것/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떼가 몰려와/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극치」 일부).
이렇듯 고영민은 우수와 연민에 찬 눈으로 세상과 우주만물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간과하거나, 생각하더라도 마음뿐인 감정선들을 그는 결코 흩트리지 않고 시적 형상화에 다다른 것이다. 저녁 논물에 들어와 앉은 그의 산은, 어쩌면 일상의 고적함과 허허로움을 달래주는 어둠 속 늙은 소나무인지도 모른다. 소나무 밑동에는 마른 솔잎이 층층이 삶의 버짐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우수와 연민, 세상과 우주 만물에 대한 따스한 시선-고영민의 시세계 『사슴공원에서』(2012)
박정희(朴貞熙)
작품은 시인의 내면적인 풍경이다. 그가 생각했던 지향점, 그의 정신세계, 그가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짐작해 보려한다. 그는 우수와 연민, 세상에 대한 따뜻한 감성을 가지고, 그가 애정을 가진 사물의 세계를 통해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시를 쓰기 위한 그의 관찰은 세밀하면서도 따뜻하고 공감각적이다. 즉 폴발레리와 구상 시인이 강조한 사물에 대한 우주적 감각과 우주적 연민이다. 「마중」, 「동행」, 「원두」, 「극치」를 통하여 그의 시세계를 살펴본다.
그의 시 「마중」에서는 그가 겪었던 죽음에 대한 기억들, 삶의 곡절이 가슴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젊은 날 죽음을 맞이한 형이 그립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각나서, 아버지가 형을 데리고 저승에서 지금 이곳에 나타나 줄 것만 같은 환영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형이 다시 저 산 길로 살아왔으면 좋겠다” 이 한마디로 그리움과 아픔과 기대감이 함께 버무려져 슬픈지 아픈지 괴로운지 뒤섞여져 간절한 소망으로 매달린다. 여기에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먼저 떠난 형을 떠메고 올 것만 같은 희망에 그리움은 더욱 밀려온다. 그래서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다시 저 길로 살아서 왔으면 좋겠다/죽은 아들을 살려 떠메고/함께 웃으면서 왔으면 좋겠다”라고 허공중에 되뇌인다.
먼저 아들을 보낸 아버지는 더욱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가슴앓이를 하다가 일찍 돌아가셨는지도 모른다. 그 아버지의 깊은 슬픔을 지켜보았던 남아있는 아들은 오늘 더욱 가슴이 저린다. 아버지의 멍이 된 형, 그 아들을 만나려 먼저 떠난 아버지, 남은 자는 떠난 자의 환생을 꿈꾼다. 꽃처럼, 그리고 꽃처럼 환하게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들은 다시 살아서 온다/달큰한 아버지의 술냄새처럼/꽃들은 온다/비틀비틀 온다/산 절로 물 절로, 흥얼흥얼 고래고래/노래를 부르며 온다”(「마중」 일부).
또한 고영민의 시선은 돌멩이, 그림자,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등의 소외되고 외로운 삶의 아픈 곳들을 찾아 간다. 「동행」에서 길가에 하찮게 나뒹구는 돌멩이, 아무도 눈여겨 봐주지 않는 돌멩이,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발로 걷어 차 버리는 돌멩이에게도 미안하고 안타까운 시선을 쏟는다.
“길가 돌멩이 하나를 골라/발로 차면서 왔다/저만치 차놓고 다가가 다시 멀리 차면서 왔다/먼길을 한달음에 왔다...책임 못 질 돌멩이를/집 앞까지 데려왔다”(「동행」 일부).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돌멩이 덕분에 나는 지루하지 않게 집에까지 잘 왔지만, 돌멩이에게는 너무 무심했다. 생각 없이 무심코 한 행동을 반성한다. 돌멩이이기에, 영혼이 없어서 아무렇게나 함부로 대해도 괜찮은 줄 알았는데, 마음을 열고 보니 책임도 질 수 없는 일을 덥석 저지르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아프게 한 것 같은 미안한 마음, 따뜻한 배려가 생겼다. 우주만물과 소통하는 삶의 진지함이 묻어난다.
이러한 세상을 향한 열린 마음은 「원두」에서도 엿보인다. “원두를 넣고 물을 부어/커피를 내린다” 커피 한잔을 마시려 한다. 그리고 이 커피를 건네준 커피나무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뉘와 같이 이 커피를 마실까 고민해 본다. 생각난 사람들 중에는 평소 그가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들이 생각난다. 소외된 곳, 외로운 곳이다. 외국인 노동자, 아픈 이들이다. 같이 커피를 나누며 아프지 않은 세상을 나주고 싶은 것이다.
“올 봄 당신은 저 나무에게서/몇 잔의 뜨겁고 진한 꽃나무 밑으로/외국인 노동자 몇 명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지나갔다...전동휠체어를 탄 뇌성마비 여자가/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리며/미끄러지듯 지나갔다”(「원두」 일부)
고영민은 우주만물의 뜨거운 열정을 사랑한다. 「극치」에서 개미와 소의 부지런한 열정을 우체부의 하루일과를 통하여 바라본다. 이로써 인간뿐만이 아니라 미물과 동물들에게도 자기 일에 심취하며 살아가는 것들에게 애정어린 찬사를 남긴다.
“개미가 흙을 물어와/하루종일 둑방을 쌓는 것” “소가 제 자리의 띠풀을 모두 먹어/길게 몇 번을 우는 것” “어스름 저녘/고갯마루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우체부가 밭둑을 질러/우리 집 쪽으로/ 걸어오는 것”(「극치」 일부).
금낭화, 잠자리, 마른솔잎, 산그림자까지도 그것들만의 방법으로 자연스럽게 우주만물과 어우러져 순회하며 최선을 다하는 것에 공감한다. “금낭화 핀 마당가에 비스듬히 서보는 것” “늙은 소나무 밑에/마른 솔잎이 층층 녹슨 머리핀처럼/노랗게 쌓여 있는 것/마당에 한 무리 잠자리떼가 몰려와/어디에 앉지도 않고 빙빙 바지랑대 주위를 도는 것/ 저녁 논물에 산이 들어와 앉는 것””(「극치」 일부).
이렇듯 고영민은 우수와 연민에 찬 눈으로 세상과 우주만물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보낸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간과하거나, 생각하더라도 마음뿐인 감정선들을 그는 결코 흩트리지 않고 시적 형상화에 다다른 것이다. 저녁 논물에 들어와 앉은 그의 산은, 어쩌면 일상의 고적함과 허허로움을 달래주는 어둠 속 늙은 소나무인지도 모른다. 소나무 밑동에는 마른 솔잎이 층층이 삶의 버짐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