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도 절망도 없는 건조한 삶의 그림 -이선욱의 시세계 『탁, 탁, 탁』(2015 초판)






희망도 절망도 없는 건조한 삶의 그림 -이선욱의 시세계 『탁, 탁, 탁』(2015 초판)



 박정희(朴貞熙)



序, “낯선 삶의 방정식”

 

타자기를 두드리듯 이선욱의 시들은 현대인의 낯선 일상과 삶의 태도를 담담하게 그린다. 타자기의 속도가 더해질수록 손놀림은 빨라지고 생각은 무심하게 방전 된다. 그러다 보면 같은 문구를 연달아 칠 때도 있고 행갈이를 거듭하기도 한다(「탁, 탁, 탁」). 이웃을 굳이 의식하지 않고 과거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냉담한 것도 아닌 조금은 무미건조한 도회지적 삶이다. 이웃과 단절된 것은 아니지만 이웃을 고려하지 않는다. 서로 이름은 모르며 목례 정도 하고 지내는, 어디에서 왔는지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 필요도 없는 회색빛 삶이 그의 시에서 우러난다.

중요한 것, 특별한 것은 기억하되 나머지는 떨쳐낼 수 있는 건조함과 견고함이 특징이다. 단어와 문장의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일정한 형태의 보폭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보폭의 느낌은 안정감이나 균형감, 편안함이 아니라 ‘거리두기’다. 딱딱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작자의 태도에서 21세기 인류(사람들)의 평균 의식과 사고 영역을 읽어내게 된다. 주위나 타인과의 적절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도시 거주민들 삶의 방식을 이선욱의 시에서 확인한다.


 

本, “거리두기와 순치된 삶”

 

시인의 ‘거리두기’는 삶의 권태를 그로 인해 일상에 순응된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제 이선욱의 시를 분석하면서 반항하지 않는 삶의 형태, 희망이나 절망마저도 ‘거리두기’를 시도하는 모습들을 관찰해 본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어요

연필 치듯 비스듬히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새카맣게 젖은 머리칼이며

낯설고 가쁜 숨소리 마주하고 있었죠

 

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문득 통증 같은 몇 사람 생각이 스쳤지만

그런 식으로 빗물 눈물을 구별할 사연은

마땅히 생각나지 않더군요

설사 생각난다 해도 어떻게 달리 마주했겠어요

 

(…)

 

크고 작은 흠집으로 가득했지만

곳곳마다 사금 같은 빛들이

얽혀 있는 반지였어요

무잇이냐고 물으니 고개를 가로젓더군요

 

(…)

 

부러 반지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손에서 빠질 기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죠

불현듯 몇 가지 생각이 사금빛처럼 스쳤지만

금세 캄캄하게 묻혀버리더군요

 

그러면 아파야 했을까요

무심해야 했을까요

마주한 숨결 산산이 흩어지고

빗소리만 잠잠히 들릴 때까지도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 사연이란

끝내 생각나지 않았어요

 

―「낯선 선물」 일부

 

알 것 같은, 아니면 전혀 몰라도 좋은 사람이 반지를 건냈다. 나를 아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끄덕이므로 분명히 나를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쩌면 생각나지 않고 싶은 지도 모른다. 이제 그와의 관계는 지워졌고 지워진 관계의 복원은 부자연스럽다고 느낀 것이리라. 지난 시기와의 자연스런 단절과 건조한 ‘거리두기’다. 건네 받은 반지를 굳이 빼내려고 하지만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끝내 그와의 사연은 생각나지 않는다. 견고한 건조함이다.

 

너는 잠들지 않았어

조금 피곤했을 뿐이지

누구나 그 정도의 피로는 느낀다네

그건 오히려 강하다는 증거지

이렇게 버틸 수 있으니까

무엇이 너를 그토록 단단하게 만들었나

정말로 대단하구 자네!

번화가의 힘찬 음악처럼

너는 결코 지치지 않는다네

꿈처럼

미래처럼

자, 가세!

전력으로 살아 있는 너의 권태를 증명하러!

 

도시는 화창했고

거리 곳곳마다 선명한 명암들이

너를 깊게 스쳐갔네

이봐, 거기 쓸쓸한 친구!

너는 잠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잠들지도 못하지

이상하지 않나?

―「거리에서」 일부

 

시인은 지치지 않는 전력으로 살아있는 권태를 이야기 한다. 잠들지도 않았지만 잠들지도 못하는 이상한 상태는 결국 권태의 또 다른 이름이다. 권태를 소비하고 있는 “거기 쓸쓸한 친구”는 시인이 스스로를 부른 것이다. 화창한 도시의 화려한 네온싸인과 입간판, 들끓는 인파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은 도시의 구성원이면서도 존재감을 갖지 못한다. 결국 존재감 없는 개인의 무력감은 권태라는 이상 징후로 나타난다. 이 권태는 소외된 인간군상이 선택할 최소한의 자기 존재 확인이기도 하다.

 

부러 반항하지 않았네

반항이야말로 예고된 행보였으므로

차라리 그건 턱끝 같은 한계에 가까웠지

진정으로 어긋나기 위해

나는 순응했어

 

비가 스치는 차창을 바라보며

나는 택시가 가자는 대로

기사를 몰았고

음악이 들리는 대로

흐린 라디오를 돌렸으며

또는 그런 식으로

사랑이 하자는 대로

했을 뿐이야

 

(…)

 

계절의 수많은

낮과 밤을 교차하며

나날이 감퇴해가는 시력처럼

그렇게 절망이 희망과는 무관하게

순응했을 뿐이라네

 

―「매캐한 밤의 기록」 일부

 

안개 끼고 깜깜한 도시의 밤, 시인은 주어진 상황에 이끌려 가는 자신을 바라다보며 스스로에게 변명한다. 진정으로 어긋나기 위해 순응하는 것이라고. 반항은 예고되어 있기에 더 이상 일부러라도 반항하지 않는 것이라고 위로한다. 절망도 아니고 희망도 아닌 삶에 순응하는 낮과 밤들. 시인의 독백에도 불구하고 예고된 반항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순응이 거듭되다보면 낮과 밤, 계절이 더해질수록 그러한 상황 그 자체에 익숙해지므로. 길들여질수록 야성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에 시인의 자조는 자신에 대한 합리화에 머무르게 된다.

 

희망을 생각하면

구체적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요

 

(…)

 

그럼에도 또 어디엔가

무색의 희망을 긁적이는 것은

다만 내 버릇이 조금 과한 탓일까요

 

(…)

 

공교롭게도 표정 속에

희망은 보이지 않았어요

예컨대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고

어쩌면 그 때 내가 쓴 것 역시

글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몰라요

―「감옥에서」 일부

 

순응된 삶에서 희망이 얼마나 꿈틀거릴까. 시인은 희망을 떠올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어느 한 구석에 남아있는 희망을 찾아보기 위해 무색의 희망을 긁적여 보기도 하지만, 결국 희망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절망을 떠올리지도 않는 무채색의 나날들이 시인에게 주어지고 있다. 보통, 평범, 대개의 일상들은 시인의 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희망도 절망도 크게 다가오지 않는 무덤덤한 삶, 결국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네

괴로운 날들 속에서

 

괴로워했지

빛나는 입을 맞추고

 

괴로워했지

서로의 몸을 끌어안으며

 

등뒤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았네

 

미래는 조금씩 선명해졌지

괴로운 날들 속에서

 

사랑은 오고 있었네

끝없는 모습으로

 

사랑은 가고 있었네

가장 아름다운 결말로

―「연인들」 일부

 

괴로운 날들 속에서 사랑은 오고, 괴로운 날들 속에서 사랑은 가고 있었다. 결국 사랑은 괴로움 속에서 움텄다가 잎새를 달고 낙엽되어 떨어졌다. 왜 서로 사랑했을까는 의미 없는 질문이다. 빛나는 어깨를 맞대고 기다리기도 했으나, 결국은 괴로운 침묵이었다. 빛나고 싶었다. 단지 그리되었을 뿐이다. 시인이 그린 연인들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結, “괴로운 날들의 침묵”

 

시인은 무거워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조금은 즐겁고 싶었을 뿐(「어느 저술가의 산책-공원 방향」)이라고 했다. 조금은 더 유쾌해지고 싶었으나 특별히 달라지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러나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위악과 위선을 가장한 아픔이다. 해보고 싶었으나 실상은 할 수 없었고, 억지로 해 봤으나 결과는 신통하지 않았으므로, 현명하게 포기하는 것이다.

결국 삶에 순응하고 괴로운 날에 사랑하는 것은, 권태 속에서 매일 매일을 소진하는 것은, 삶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비겁하지만 덜 비겁하게 침묵으로 일관하는 셈이다. 영악하다. 그러나 결코 밉지 않은 우리들 대부분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찬란하게 빛나고 싶었고 오월의 장미보다 아름답고 싶었다. 그러나 주어진 나날들은 녹록하지 않았으므로 권태를 가장한 매일 매일의 분투이다. 상처받을까봐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다가갔다가 상처받은 영혼들의 아픈 고백이다. 적절한 ‘거리두기’는 희망도 절망도 없는, 우리 모두 대개의 건조한 삶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되 굳이 혀를 차지도 않는다. 이 같은 삶의 태도를 얼굴 그림으로 비유하여 그린다면 이목구비 중에서 눈, 코, 입 정도만 그리고 눈썹이나 입술, 턱, 광대뼈, 이마 등은 과감하게 생략한 캐리커처 정도가 될 것이다. 일상을 건조하게 관찰하여 ‘거리두기’로 그린 시적 경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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