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일상과 꿈 없는 꿈의 세계 - 송승언의 시세계 『철과 오크』(2015)






건조한 일상과 꿈 없는 꿈의 세계 송승언의 시세계 『철과 오크』(2015)



 박정희(朴貞熙)


 

―‘그냥’ 과 ‘상관없음’에 관하여

송승언은 미련을 두지 않는 건조한 시쓰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 뜻을 해석하는 것은 부질없다. 그냥 읽고 다가오는 느낌이 있으면 느끼고, 느낌이 굳이 없다면 없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가볍고 건조하고 뒷모습이 남겨지지 않는 시들이다. 물론 그도 현실과 일상의 신경쓰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건조한 시쓰기가 나름의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굳이 고민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면, 고민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실의 고통이 너무 크기에, 그 현실을 이겨내려는 동력을 ‘관심 없음’에서 찾는 지도 모른다. 문제해결에 집착하면 할수록 점점 곤란한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방향 전환을 통해 다른 각도에서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일상의 주어진 상황에 대해 불가항력일 때, ‘자연스럽게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기’가 오히려 방법인 경우가 있다. 다가서는 것보다 가만 놔두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현실이 암담할 때 이에 대한 저항의 강력한 수단이기도 하다. ‘상관없음’이든지 가벼운 것이든지 풀어헤쳐 던져 서서히 증발해 가는 송승언의 시를 읽어 보고자 한다.

 

―‘이미지의 중첩’과 ‘놀이’에 관하여

일상의 따분함에 내리 눌리고 마땅한 탈출구가 없을 때, 오락을 통한 휴식은 의미가 있다. 재충전을 통해 일어날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오락에는 언어의 유희도 있으며 이 유희에는 다양한 방법이 구사될 수 있다. 웅얼거림을 뜻하기도 하는 “다다”의 연상은 사회의 총체적인 모순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도피이기도 하다. 이미지의 중첩이 과잉 생산되어 난해하지만 이는 시를 이해하는 방법론의 문제일 뿐이다. 즉 “그냥” 연상하는 것이고 “그냥” 느끼는 것이다. 느껴지지 않는다 해도 별 문제가 아니다. 원래부터 소통을 위한 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혼자 놀고 혼자 놀다가 심심하면 다시 지우고, 지웠다가 더욱 심심하면 집에 돌아오면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의 익사체로 남은 천사들이 한강으로 날아와

성산대교니 행성이니 하는 것들을 부수고 있었다

멋진 광경이었다

이미지가 지루해지면 집으로 왔다

―「망원」 전문

 

잎과 가지 너머 많은 잎과 많은 가지 그 너머 보이지 않지만 길이 있지 그 길가에 많은 잎과 많은 가지가 있다 보이지 않는 길로 보이지 않는 차가 지나가고 보이지 않는 사람이 지나간다 보이지 않는 벤치에 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열리지 않는 창고에서 말이 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난다 내용 없는 수업이 있고 아무도 없는 교실이 있다 반쯤 걷힌 블라인드에 가려진 잎과 가지가 있다 많은 잎과 많은 가지 그 너머의 잎과 가지는 간격을 잃고 울고 있다 그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 것

―「피동사」 전문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이미지로만 남은 익사체이다. 그 이미지는 천사가 되어 한강으로 날아오른다. 멋진 광경이라고 시인이 찬미한 성산대교의 부서짐은 행성 폭발이기도 하다. 그런 뒤 이미지를 갖고 놀다가 지루해지면 집으로 왔다는 시인의 은밀한 고백을 기억해야 한다. 느낌이 곧 시이다. 그래서 시는 읽기가 끝나면 드라이아이스처럼 휘발하여 기꺼이 버려지는 것이다. 일상의 무거움에는 애써 관심을 거둔다. 일상의 간편함, 패스트푸드의 편리함만 남게 된다. 하지만 종일, 아니면 한달 내내 패스트푸드만 먹으면 몸은 안전할 지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현실에 무관심해지면 ‘다음’이라는 대안은 생성될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 이를 시인의 몫으로 돌려 질문해 둔다.

무관심으로 “피동사”가 되어버린 시인은 현실에서 무엇을 헤쳐 놓고 무엇을 주어 담아야 하는지 답을 알지 못한다. 그냥 있으니까 그대로인 것이다. 그 이면은 알 수가 없다. 잎과 나뭇가지가 많이 있어서, 그 너머로 길이 있지만 보이지 않고 볼 필요도 없다. 사실은 길이 없을 지도 모르기 때문에 시인에게는 해답이 없다. 그래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원래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므로.

 

내 책상 위에 국화가 있었다

(…)

 

줄 세워진 우리들 손에 들린 국화를 잊는

 

선생이 들어온다 활자가 가득한 칠판

국화를 들고서 말이 없었다

말을 못했다 오늘 당번은 누구지

선생은 말하고

 

당번은 죽었어요 말을 못했다

국화를 들고서

우리는 우리의 차례를 기다린다

 

편지가 놓였다 내 책상 위에

당번은 읽어라 선생은 말한다

읽지 못했다 당번이 죽었지

슬픈 일이다 그래도 수업은 해야지

선생은 말한다

 

너는 교과서를 읽어라 종이 울릴 때까지

 

읽지 못했다 책상 앞에 앉아

애가 죽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너의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내 책상이 있던 교실」

 

이 시의 화자는 죽은자이다. 죽은 자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국화를 보며 말한다. 건조하게 말하는 그는 이미 죽었지만, 살아있는 우리는 우리의 차례를 기다리며 죽은 그의 책상 위에 국화를 놓는다. 그는 당번이며 죽었으므로, 선생이 교과서를 읽으라 했으나 읽지 못했다. 읽지 못하는 당번의 죽음에 대해, 선생은 슬픈 일이지만 수업은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우리들이 “애가 죽었어요”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는 선생은, “종일 울릴 때까지” 죽은 당번에게 “교과서를 읽으라”고 한다.

건조하지만 담담하게 읽히는 이 시는 송승언의 시중에서는 드물게 작자와 독자의 소통이 가능하다. 자동기술이나 극단의 다다이즘에 의하지 않은 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단어의 반복 나열과 건조함을 의도적으로 구사하였다. 슬픔을 슬프지 않게 표현함으로써 슬픔을 극대화하였다.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 슬픔도 깊은 슬픔의 일종임을 이 시는 시사한다. 담담하고 의연하게 당번의 죽음을 통해 슬픔을 주지시킨다. 드라이플라워의 아름다움이 생화의 아름다움에 못지않을 때가 있음이 확인한다.

 

판결 이후

걸어간다

과수원으로

열린 문으로

광장은 공원으로

어른은 정강이뼈로

대체되었고

새들은 법을 잊었다

‘공중을 철거할 것’

침묵을 허물며

돌아오고 있다

내가 부른 휘파람이

나를 부른 휘파람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낫을 멘 사자가

걸어오고 있다

목을 달라고,

목이 필요하다고

목메어 노래하며

가족은 모여 있다

나를 등지고 나란히

목매달고 있다

―「수확하는 사람」 일부

 

송승헌의 시는 ‘모를 일이기도 하고 모가 나기도 했지만 못질을 하면서 모파상을 떠올리다가, 못내 못자리에서 모를 심지는 않는다’ 식으로 자동기술에 따라 흘러간다. 이 시에서 화자는 무언가 죽음과 자살과 억울함과 황폐함을 드러내려 한다. 하지만, 자동기술과 연상, 전복, 무의미의 반복들이 단어들의 의미를 이미지에 가두어 버렸다. 때로는 굳이 뭘 말하려는 것은 아니고 “다다”를 읊조리기도 한다. 내가 휘파람을 불었고 휘파람은 나를 불러내니 휘파람이 휘파람인지도 알 수 없고, 원래 휘파람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목을 달라고”고 죽음의 사자를 보내는 삶의 고통이 “나를 등지고 나란히 목매달고 있”는데, ‘다다’거리며 힘을 소진하고 혼자 남고 말았다.

 

그러나 혼자 노는 것에는 그에 따른 고통도 외로움도 있다. 현대인의 소외와 대책 없음의 절망적인 표현방법이기도 하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시인과 그의 시를 읽는 독자에게 있다. 그러니 언어의 감각만을 갖고 놀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놀 것인가. 놀다가 지치면 어찌할 것인지 고민할 때가 되려면 아직 이른가. 시에서든 삶에서든 무거움과 가벼움이 사방격자무늬로 중첩되어 다양해야 할 것이다. 송승언의 시에서는 가벼우면서도 건조한 아픔들이 읽힌다. 그 가벼움이라도 왜 한 켠에는 아픔이 없으랴. 삶은 고단하고 진지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현실의 이면을 생각하며 이미지만으로 시를 쓰고 읽는 시창작과 독해의 방법은, 흔들의자에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내맡기는 행위와 같다. 온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팔걸이에 손을 얹으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중하게, 혹은 진지하게라는 의미는 없다. 아무런 상념 없이 호흡을 하고 눈은 굳이 행간의 의미를 살필 필요가 없다. 극도로 사변적인 자동기술적 초현실주의 작품에서 추구하는 것은 “그냥”이다. 왜 이 단어가 기술되었는지 작가가 무얼 말하려 하는지 느끼려는 순간 작품은 증발되어 버린다. 드라이아이스의 특징은 마지막에 남겨짐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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