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압과 광기에 대한 응시, 삶의 의지와 시의 힘 - 이승하의 시세계 『공포와 전율의 나날 』(2015 개정판)
박정희(朴貞熙)
공포, 불안, 전율, 광기, 처벌, 감옥, 감시, 고통... 시인이 천착한 언어들이다. 미셸 푸코가 사고하는 지식과 주체와 권력의 문제의식이 발현된다. 그리고 생존의 암울함까지 더해진다. 인류의 역사에서 폭압과 광기가 사라질 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지난 한 세기 동안 폭압에 대한 저항이 해방으로 다가올 것을 확신했던 인류의 실험은 실패했다. 이제 새로운 세기에 우리는 또 어떤 혁명을 꿈 꿀 것인가. 폭압에 대한 저항이 박제화 되어 또 다른 폭압으로 전화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았다. 인간 이성에의 기대가 무너진 폐허에서, 우리가 그려내야 할 새로운 그림의 바탕색을 이승하의 시 『공포와 전율의 나날』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뭉크의 사색과 분열적 화폭 전개는 우울하다. 그의 그림이 묘사하는 내용들은 부조리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오로라의 환상 속에서 재배치하고자 하나, 강고한 의식 이쪽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승하가 「화가 뭉크와 함께」에서 꿈꾸는 것은 의식의 저쪽에 있는 피안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어둠과 혼돈의 강이 유황불에 휩싸여 있다. 이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누구와 함께 건널 것인가.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두 팔이 잘려 나갔고(「변씨의 사진 -딸 민희에게」), 오체 투지를 해도 밥 한 끼 나오지 않는 절대 굶주림에 생명줄을 내려놓고 있으며(「이 사진 앞에서」), 다리 하나와 팔 하나가 없다(「외다리로 뛰는 자」).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일제 침략을 증언하면서, 감옥에서 마음이 약해지거나 용기가 스러질 즈음이면 변씨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변씨의 사진 -딸 민희에게」). 아나키즘 의열 투쟁을 하다 육삼정 사건으로 체포되어 해방을 감옥에서 맞이했던 혁명가에게, 변씨라고만 알려진 농부의 시퍼런 기개와 형형한 눈빛은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각성제였을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저항하거나 희생되었던 수많은 변씨들은 형태를 달리하여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 변씨들은 의롭고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승하는 딸에게 이 가슴 서늘한 변씨의 사진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시인이 펼쳐보여 주는 또 다른 변씨들의 사진을 보며 그가 걸어가는 길을 숨죽이고 따라가 보자.
어디서 우 울음 소리가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 소리가
끄끊어질 듯 끄끊이지않도
드들려와
(…)
소소름끼쳐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화가 뭉크와 함께」 일부
유약한 인간은 언제나 불안에 떨고 공포에 무너진다. 뭉크의 내면적 세계는 불안과 공포에 절규한다. 그 사내가 존재하는 배경에는 우울함과 신비로움이 휘돌아 치는 북유럽의 하늘이다. 시인은 이 사내가 절규하는 이유를 안다. 많은 사람들이 번다하게 살아가지만 텅빈 도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웃는 소리이기도 하다.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도달한 도시는 난민들에게는 낯선 도시였고 또 날선 도시였다. 보트피플에게 이웃은 없었다. 이 사내는, 시인은, 아니 우리 모두는 텅빈 도시와 부조리한 세상을 부인하며 절규한다. 세기말의 우울을 동반한 학살극을 바라보며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내 딸 민휘야
내 태어난 이 땅에 네가 태어났으니
내 죽을 이 땅에서 네가 죽을 것이다
힘 못 길러 짓밟힌
조상의 한 사람인 변씨
그의 사진을 보며 네 아빠는 운다
떳떳이 죽어간 조상 앞에서
살다 지쳐 아주 괴로울 때는
이 사진을 보아라
―「변씨의 사진–딸 민휘에게」 일부
내가 태어난 이 땅에 내 딸 민희도 태어났고, 내가 죽어 묻힐 이 땅에 내 딸 민희도 죽어 묻힐 것이다. 그러기에 이 땅의 모순에 대해 고민한다. 두 팔이 잘려나간 30대 변씨 성의 농부가 외친 것은 대한 독립 만세이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세상의 모순을 절규한 것이기도 하다.
변씨 성의 그는 이 사진 한 장으로 영원히 살아 있다. 그가 외친 대한 독립 만세는 그 어떤 수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함, 자주 의식의 발로였다. 그가 두 팔을 내놓고 결국 목숨마저 버린 대한 독립의 염원은 이뤄졌는가? 평범한 농부가 밭 갈고 땀 흘리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는가? 시인은 변씨의 사진을 딸 민희에게 보여주며 당부한다. 살다 지쳐 괴로울 때 이 사진을 보며 힘을 내라고.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TIME》지의 사진
―「이 사진 앞에서」 일부
시인은 타임지에 실린 소말리아 어린이의 사진을 보았다. 굶주려 뼈만 남은 어린이는 땅에 온 몸을 내맡기고 있다. 시인은 취한 채 귀가하다 골목길에 먹은 것을 게웠던 사실을 떠올린다. 이 죽어가는 생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인류의 절반이 굶주리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쪽에서는 남아서 쓰레기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모자라 목숨을 두고 가야하는 이 모순을 어찌할 것인가. 인간 존엄의 가치가 구현되는 세상이 언제 올 것인지 시인은 고뇌한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에 애써 등 돌리는 허위 의식을 폭로한다. 시인은 식사 전 신에 대한 감사 기도가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는 날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외다리로 사는 그대
비상구를 찾아서 뛰어가고 있는가
도처에서 나타나는 지옥에의 계단들을
외다리로 올라가고 외다리로 내려가고
분단된, 분리된, 분열된 지상의
어느 닫힌 문을 두드리려 하는가
두드리면 정말 열릴 것인가
(…)
사업가가 된 성직자들에게
배달하러 뛰어가고 있는가
팔과 다리를 하나씩 절단한
이 땅의 버림받은 군상을 외면한 채
헌금함을 엿보는 예수가 있다면
묵비권을 행사하는 예수가 있다면
외다리로 부지런히 뛰어가
그의 얼굴에 그 신문을 덮게
외다리로 죽을 그대
―「외다리로 뛰는 자」 일부
외다리와 외팔로 신문을 배달하고 있다.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기 전에 삶의 의지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사진 속 표정에서 눅눅함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생 이면에 흐르는 피고름을 떠올리게 된다. 진지한 모습이 오히려 처연하다. 외팔과 외다리로 그가 전하는 신문의 내용은, 공전되었던 국회 상임위원회가 정상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을 받아들 성직자들은 오직 신의 종으로서 성결한가. 혹시 신은 교인들의 헌성금 내용에 따라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가.
시인은 외팔과 외다리의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를 떠올린다. 모자란 한 팔과 한 다리의 그가 한 세상을 잘 살고 갈 것인지를 떠올린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우리 모두는 외팔과 외다리의 그보다 더 잘 살고 갈 수 있을까. 더 이상의 수사가 먹먹해지는 이 사진으로 시인은 삶의 의지와 숭고함을 세상에 표현하고 있다. 공자가 시경을 통해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고양시키고자 한 까닭은 인간의 선의지를 믿었기 때문이다. 추함과 탐욕, 악함까지도 드러냄으로써 결국 인간 본성이 정화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시인 또한 인간의 광기와 억압, 모순을 고발하면서도 치열한 삶의 의지도 알려주고 있다. 시인의 역사의식, 철학 그리고 시의 힘이다.
폭압과 광기에 대한 응시, 삶의 의지와 시의 힘 - 이승하의 시세계 『공포와 전율의 나날 』(2015 개정판)
박정희(朴貞熙)
공포, 불안, 전율, 광기, 처벌, 감옥, 감시, 고통... 시인이 천착한 언어들이다. 미셸 푸코가 사고하는 지식과 주체와 권력의 문제의식이 발현된다. 그리고 생존의 암울함까지 더해진다. 인류의 역사에서 폭압과 광기가 사라질 날이 오기는 올 것인가. 지난 한 세기 동안 폭압에 대한 저항이 해방으로 다가올 것을 확신했던 인류의 실험은 실패했다. 이제 새로운 세기에 우리는 또 어떤 혁명을 꿈 꿀 것인가. 폭압에 대한 저항이 박제화 되어 또 다른 폭압으로 전화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보았다. 인간 이성에의 기대가 무너진 폐허에서, 우리가 그려내야 할 새로운 그림의 바탕색을 이승하의 시 『공포와 전율의 나날』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뭉크의 사색과 분열적 화폭 전개는 우울하다. 그의 그림이 묘사하는 내용들은 부조리한 세상의 이야기들을 오로라의 환상 속에서 재배치하고자 하나, 강고한 의식 이쪽의 세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승하가 「화가 뭉크와 함께」에서 꿈꾸는 것은 의식의 저쪽에 있는 피안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쪽과 저쪽 사이에는 어둠과 혼돈의 강이 유황불에 휩싸여 있다. 이 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 누구와 함께 건널 것인가.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두 팔이 잘려 나갔고(「변씨의 사진 -딸 민희에게」), 오체 투지를 해도 밥 한 끼 나오지 않는 절대 굶주림에 생명줄을 내려놓고 있으며(「이 사진 앞에서」), 다리 하나와 팔 하나가 없다(「외다리로 뛰는 자」).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이강훈은 일제 침략을 증언하면서, 감옥에서 마음이 약해지거나 용기가 스러질 즈음이면 변씨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변씨의 사진 -딸 민희에게」). 아나키즘 의열 투쟁을 하다 육삼정 사건으로 체포되어 해방을 감옥에서 맞이했던 혁명가에게, 변씨라고만 알려진 농부의 시퍼런 기개와 형형한 눈빛은 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각성제였을 것이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저항하거나 희생되었던 수많은 변씨들은 형태를 달리하여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또한 그 변씨들은 의롭고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승하는 딸에게 이 가슴 서늘한 변씨의 사진을 보여 주고 있다. 이제 시인이 펼쳐보여 주는 또 다른 변씨들의 사진을 보며 그가 걸어가는 길을 숨죽이고 따라가 보자.
어디서 우 울음 소리가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 소리가
끄끊어질 듯 끄끊이지않도
드들려와
(…)
소소름끼쳐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화가 뭉크와 함께」 일부
유약한 인간은 언제나 불안에 떨고 공포에 무너진다. 뭉크의 내면적 세계는 불안과 공포에 절규한다. 그 사내가 존재하는 배경에는 우울함과 신비로움이 휘돌아 치는 북유럽의 하늘이다. 시인은 이 사내가 절규하는 이유를 안다. 많은 사람들이 번다하게 살아가지만 텅빈 도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웃는 소리이기도 하다.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목숨을 건 항해 끝에 도달한 도시는 난민들에게는 낯선 도시였고 또 날선 도시였다. 보트피플에게 이웃은 없었다. 이 사내는, 시인은, 아니 우리 모두는 텅빈 도시와 부조리한 세상을 부인하며 절규한다. 세기말의 우울을 동반한 학살극을 바라보며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내 딸 민휘야
내 태어난 이 땅에 네가 태어났으니
내 죽을 이 땅에서 네가 죽을 것이다
힘 못 길러 짓밟힌
조상의 한 사람인 변씨
그의 사진을 보며 네 아빠는 운다
떳떳이 죽어간 조상 앞에서
살다 지쳐 아주 괴로울 때는
이 사진을 보아라
―「변씨의 사진–딸 민휘에게」 일부
내가 태어난 이 땅에 내 딸 민희도 태어났고, 내가 죽어 묻힐 이 땅에 내 딸 민희도 죽어 묻힐 것이다. 그러기에 이 땅의 모순에 대해 고민한다. 두 팔이 잘려나간 30대 변씨 성의 농부가 외친 것은 대한 독립 만세이다.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세상의 모순을 절규한 것이기도 하다.
변씨 성의 그는 이 사진 한 장으로 영원히 살아 있다. 그가 외친 대한 독립 만세는 그 어떤 수사로도 설명할 수 없는 숭고함, 자주 의식의 발로였다. 그가 두 팔을 내놓고 결국 목숨마저 버린 대한 독립의 염원은 이뤄졌는가? 평범한 농부가 밭 갈고 땀 흘리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는가? 시인은 변씨의 사진을 딸 민희에게 보여주며 당부한다. 살다 지쳐 괴로울 때 이 사진을 보며 힘을 내라고.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TIME》지의 사진
―「이 사진 앞에서」 일부
시인은 타임지에 실린 소말리아 어린이의 사진을 보았다. 굶주려 뼈만 남은 어린이는 땅에 온 몸을 내맡기고 있다. 시인은 취한 채 귀가하다 골목길에 먹은 것을 게웠던 사실을 떠올린다. 이 죽어가는 생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인류의 절반이 굶주리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쪽에서는 남아서 쓰레기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모자라 목숨을 두고 가야하는 이 모순을 어찌할 것인가. 인간 존엄의 가치가 구현되는 세상이 언제 올 것인지 시인은 고뇌한다. 그리고 인간의 탐욕에 애써 등 돌리는 허위 의식을 폭로한다. 시인은 식사 전 신에 대한 감사 기도가 정당하게 이해될 수 있는 날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외다리로 사는 그대
비상구를 찾아서 뛰어가고 있는가
도처에서 나타나는 지옥에의 계단들을
외다리로 올라가고 외다리로 내려가고
분단된, 분리된, 분열된 지상의
어느 닫힌 문을 두드리려 하는가
두드리면 정말 열릴 것인가
(…)
사업가가 된 성직자들에게
배달하러 뛰어가고 있는가
팔과 다리를 하나씩 절단한
이 땅의 버림받은 군상을 외면한 채
헌금함을 엿보는 예수가 있다면
묵비권을 행사하는 예수가 있다면
외다리로 부지런히 뛰어가
그의 얼굴에 그 신문을 덮게
외다리로 죽을 그대
―「외다리로 뛰는 자」 일부
외다리와 외팔로 신문을 배달하고 있다. 노동의 신성함을 이야기하기 전에 삶의 의지에 전율을 느끼게 된다. 사진 속 표정에서 눅눅함을 발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생 이면에 흐르는 피고름을 떠올리게 된다. 진지한 모습이 오히려 처연하다. 외팔과 외다리로 그가 전하는 신문의 내용은, 공전되었던 국회 상임위원회가 정상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신문을 받아들 성직자들은 오직 신의 종으로서 성결한가. 혹시 신은 교인들의 헌성금 내용에 따라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지는 않은가.
시인은 외팔과 외다리의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를 떠올린다. 모자란 한 팔과 한 다리의 그가 한 세상을 잘 살고 갈 것인지를 떠올린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우리 모두는 외팔과 외다리의 그보다 더 잘 살고 갈 수 있을까. 더 이상의 수사가 먹먹해지는 이 사진으로 시인은 삶의 의지와 숭고함을 세상에 표현하고 있다. 공자가 시경을 통해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고양시키고자 한 까닭은 인간의 선의지를 믿었기 때문이다. 추함과 탐욕, 악함까지도 드러냄으로써 결국 인간 본성이 정화될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시인 또한 인간의 광기와 억압, 모순을 고발하면서도 치열한 삶의 의지도 알려주고 있다. 시인의 역사의식, 철학 그리고 시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