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의 삶, 세상을 살아가는 필살기에 대한 고찰-윤성학의 시세계 『당랑권 전성시대 』(2010)
박정희(朴貞熙)
무림의 삶은 무협지 안에서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무협의 세계에서 정파와 사파의 투쟁은 현실로 그대로 전이된다. 정의로운 삶과 부조리한 삶이 직렬과 병렬로 상존하며 갈등한다. 무림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존재 의미를 찾으려면 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맡은 바 소임을 제대로 감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아니 그 소임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무림에서 당랑권은 사물의 형상을 본뜨거나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상형권법이다. 특히 당랑권은 실전에서의 효율성을 중시한 강맹한 무협의 권법이다. 버마재비, 즉 사마귀가 매미를 포획할 때 삽시간에 두 개의 날카로운 앞발로 일격을 가하는 데에서 착안했고, 거기에 원숭이의 걸음을 응용한 보법이 추가되었다고 알려졌다. 급박한 연속 단타, 상하좌우로 연달아 이어지는 전진 속공과 빠르게 빠져나오기, 상대 공격 흘려버리기가 당랑권의 핵심 요소이다.
작자는 당랑권에서 인생의 무기를 익혔다고 고백한다. 상대를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상대에게 나의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무림에서의 기본이지만 세상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다. 결국 나를 모두 드러내면 결국 상대방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터이다. 여기에서 인간 소외와 쓸쓸함이 묻어난다. 나의 정면을 보인다는 것은 언제든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이다. 앞발을 내밀되 무게 중심은 뒤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려면 나의 전진은 필연적이지만 반격을 염려한다. 그러므로 무게중심이 앞에 있으면 곤란한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는 것이 무림의 불문율이면서 우리들 삶의 현명한 방법이다. 불리하면 빠른 속도로 물러나야 한다. 이른바 후퇴 내지 철수 방법이다. 이것저것 가리다가 상대의 맹렬한 공격을 당한다면 결국 괴멸될 것이니. 나와 상대를 가늠해서 불리하면 사정권에서 즉시 물러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내줄 것은 내주어야 한다. 목숨을 부지하고 내가 반격할 최소한의 여력은 남기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다. 무림의 수련은 우리의 삶에 응용된다. 당랑권을 통해 익힌 작자의 내공을 따라가 보려한다. 버마재미 권법에서 그는 살아내는 방법을 익힌 듯하다. 그의 필살기는 무엇인가.
상대와 마주 섰을 땐 늘 중심을 뒤에 두고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혈을 지킨다
사각(死角)으로 돌아가!
연속적인 단타로 급소를 파고든다
그의 반격을 받아 흘리며
쉼없는 상하연타를 구사해
승부를 몰아간다
나는 여기서 당랑권을 익혔다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고수들을 보며 익힌 권법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랑권이다
―「당랑권 전성시대」 일부
역시 화자는 고수에게 배운 초식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넘겨준다.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으므로 거리낌이 없다. 결국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사마귀 권법의 비전 술기였다. 사랑한다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는 순간 지는 것이다. 이기기 위해 우리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기기를 강요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있어서 생존 경쟁은 치열하다. 살벌한 생존 경쟁에서 우리는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당랑권은 분명 극강의 무협이면서 우리 삶의 모순을 일깨워 준다.
넥타이를 매고 링 위에 선다
새우처럼 중심을 꺾여 그만 항복해버릴까
반칙 공격을 당해 나도 반칙으로 응수할까
무게에 눌려 쓰러진다
오늘도 원, 투에서 겨우 그를 밀어냈다
일으켜 세워져
다시 로우프를 향해 내던져진다
떠밀려가던 힘은 공격자의 영역이었지만
로우프에 튕겨나오는 순간, 그때
속도 에너지는 그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그러므로 달려간다
나를 밀어붙인 그에게 되돌아간다
그의 힘 그대로를 떠안고서
―「반동」 일부
삶은 늘 버겁다. 일상은 우리에게 항복을 강요하며 반칙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복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고 반칙을 통해 반격할 것인지 엿보기도 한다. 심판이 두 번을 셀 때에야 겨우 공격에서 벗어나는 우리는, 언제나 경기에서 질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링 위에 올라가 있지만 승리를 자신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필살기를 익혀야 함이 당연하다. 상대방에 의해 로우프로 내던져진 우리는 이제 가속도를 붙여 내동댕이쳐지거나, 아니면 그 가속도를 이용해 만만치 않은 무력을 지닌 상대를 넘어 뜨려야 한다.
작고 볼품없는 인부 하나가 철근을 옮긴다
제 키의 세배나 되는 길이의
굵은 철근 묶음을 들어올리려 한다
양쪽 끝을 다듬어 맞추고
한쪽을 들어
어깨에 힘겹게 얹는다
철근은,
인부와 지면의 각이 90도인 직각삼감형의
긴 변이 된다
어깨를 퉁겨 철근을 슬쩍슬쩍 들어올리며
그는 조금씩 앞으로 간다
한 발
한 발
철근 뭉치의 중심을 향해 간다
하중이 두 쪽으로 휘어지는 곳까지 왔다
무게중심에서
나를 누르는 것들의
중심으로 걸어가고 싶다, 그들이
어깨 위로
휘청
들어올려질 때까지
―「철근을 옮기는 법」 전문
작고 몸무게 가벼운 이가 철근을 옮기려면 그냥 자신의 힘으로만 움직여서는 불가능하다. 아니 이것은 크고 몸무게 무거운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건설 현장의 철근은 사람보다는 길고 무거울 것이므로 요령이 필요하다. 이는 곧 삶의 필살기이다. 들어야 하고 날라야 하고 기어이 오늘 일을 마쳐야 하는데, 철근을 나르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다. 건설 현장 잡부 일당 8만원, 매일매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경쟁은 치열하다. 게다가 인력 사무실에 소개료도 내야한다. 만약 철근을 나르다가 다친다면 그것은 인부의 잘못으로 귀책되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밥을 얻기 위해 철근을 날라야 한다면 필살기를 동원해야 하지 않겠나.
“어깨를 퉁겨 철근을 슬쩍슬쩍 들어 올리”는 것이 당랑권 비술 중 철근을 들어 올리는 법이다. 어쩌면 극강의 당랑권 최고 비전 비술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어깨에 힘을 빼고 어깨를 퉁기니, 내 힘은 되도록 적게 쓴다. 그리고 철근의 무게중심까지 파고들어야 마침내 철근을 어깨에 메고 나아갈 수 있다. 철근의 무게중심까지 파고드는 것이 승리의 요결이다. 이로써 당랑권은 밥을 얻어낼 수 있는 비기의 무예, 정파와 사파를 아우르는 천하제일 고수의 무림 비급임이 증명된다.
그러나 슬프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아야 하고, 링 위에서 패배를 예감해야 하고, 기껏 밥 한 끼를 위해 철근을 날라야 한다. 당랑권이 필요하지 않은 날들이 오기는 올까? 그러나 믿어보자, 믿어야 한다. 그래서 당랑권을 우리 다음 세대에는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 무림의 세계는 무협지 속에서나 찾을 수 있도록.
무림의 삶, 세상을 살아가는 필살기에 대한 고찰-윤성학의 시세계 『당랑권 전성시대 』(2010)
박정희(朴貞熙)
무림의 삶은 무협지 안에서만 펼쳐지는 것은 아니다. 무협의 세계에서 정파와 사파의 투쟁은 현실로 그대로 전이된다. 정의로운 삶과 부조리한 삶이 직렬과 병렬로 상존하며 갈등한다. 무림의 세계에서 나름대로 존재 의미를 찾으려면 제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맡은 바 소임을 제대로 감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아니 그 소임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무림에서 당랑권은 사물의 형상을 본뜨거나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진 상형권법이다. 특히 당랑권은 실전에서의 효율성을 중시한 강맹한 무협의 권법이다. 버마재비, 즉 사마귀가 매미를 포획할 때 삽시간에 두 개의 날카로운 앞발로 일격을 가하는 데에서 착안했고, 거기에 원숭이의 걸음을 응용한 보법이 추가되었다고 알려졌다. 급박한 연속 단타, 상하좌우로 연달아 이어지는 전진 속공과 빠르게 빠져나오기, 상대 공격 흘려버리기가 당랑권의 핵심 요소이다.
작자는 당랑권에서 인생의 무기를 익혔다고 고백한다. 상대를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상대에게 나의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무림에서의 기본이지만 세상 이치가 이와 다르지 않다. 결국 나를 모두 드러내면 결국 상대방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터이다. 여기에서 인간 소외와 쓸쓸함이 묻어난다. 나의 정면을 보인다는 것은 언제든 위기에 처할 수 있음이다. 앞발을 내밀되 무게 중심은 뒤쪽에 있어야 한다는 것.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려면 나의 전진은 필연적이지만 반격을 염려한다. 그러므로 무게중심이 앞에 있으면 곤란한 것이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라는 것이 무림의 불문율이면서 우리들 삶의 현명한 방법이다. 불리하면 빠른 속도로 물러나야 한다. 이른바 후퇴 내지 철수 방법이다. 이것저것 가리다가 상대의 맹렬한 공격을 당한다면 결국 괴멸될 것이니. 나와 상대를 가늠해서 불리하면 사정권에서 즉시 물러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내줄 것은 내주어야 한다. 목숨을 부지하고 내가 반격할 최소한의 여력은 남기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다. 무림의 수련은 우리의 삶에 응용된다. 당랑권을 통해 익힌 작자의 내공을 따라가 보려한다. 버마재미 권법에서 그는 살아내는 방법을 익힌 듯하다. 그의 필살기는 무엇인가.
상대와 마주 섰을 땐 늘 중심을 뒤에 두고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혈을 지킨다
사각(死角)으로 돌아가!
연속적인 단타로 급소를 파고든다
그의 반격을 받아 흘리며
쉼없는 상하연타를 구사해
승부를 몰아간다
나는 여기서 당랑권을 익혔다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고수들을 보며 익힌 권법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랑권이다
―「당랑권 전성시대」 일부
역시 화자는 고수에게 배운 초식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넘겨준다.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으므로 거리낌이 없다. 결국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사마귀 권법의 비전 술기였다. 사랑한다면 집착하게 되고 집착하는 순간 지는 것이다. 이기기 위해 우리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기기를 강요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있어서 생존 경쟁은 치열하다. 살벌한 생존 경쟁에서 우리는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사랑할 것인가. 당랑권은 분명 극강의 무협이면서 우리 삶의 모순을 일깨워 준다.
넥타이를 매고 링 위에 선다
새우처럼 중심을 꺾여 그만 항복해버릴까
반칙 공격을 당해 나도 반칙으로 응수할까
무게에 눌려 쓰러진다
오늘도 원, 투에서 겨우 그를 밀어냈다
일으켜 세워져
다시 로우프를 향해 내던져진다
떠밀려가던 힘은 공격자의 영역이었지만
로우프에 튕겨나오는 순간, 그때
속도 에너지는 그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
그러므로 달려간다
나를 밀어붙인 그에게 되돌아간다
그의 힘 그대로를 떠안고서
―「반동」 일부
삶은 늘 버겁다. 일상은 우리에게 항복을 강요하며 반칙을 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복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고 반칙을 통해 반격할 것인지 엿보기도 한다. 심판이 두 번을 셀 때에야 겨우 공격에서 벗어나는 우리는, 언제나 경기에서 질 것을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링 위에 올라가 있지만 승리를 자신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러니 살기 위해서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필살기를 익혀야 함이 당연하다. 상대방에 의해 로우프로 내던져진 우리는 이제 가속도를 붙여 내동댕이쳐지거나, 아니면 그 가속도를 이용해 만만치 않은 무력을 지닌 상대를 넘어 뜨려야 한다.
작고 볼품없는 인부 하나가 철근을 옮긴다
제 키의 세배나 되는 길이의
굵은 철근 묶음을 들어올리려 한다
양쪽 끝을 다듬어 맞추고
한쪽을 들어
어깨에 힘겹게 얹는다
철근은,
인부와 지면의 각이 90도인 직각삼감형의
긴 변이 된다
어깨를 퉁겨 철근을 슬쩍슬쩍 들어올리며
그는 조금씩 앞으로 간다
한 발
한 발
철근 뭉치의 중심을 향해 간다
하중이 두 쪽으로 휘어지는 곳까지 왔다
무게중심에서
나를 누르는 것들의
중심으로 걸어가고 싶다, 그들이
어깨 위로
휘청
들어올려질 때까지
―「철근을 옮기는 법」 전문
작고 몸무게 가벼운 이가 철근을 옮기려면 그냥 자신의 힘으로만 움직여서는 불가능하다. 아니 이것은 크고 몸무게 무거운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건설 현장의 철근은 사람보다는 길고 무거울 것이므로 요령이 필요하다. 이는 곧 삶의 필살기이다. 들어야 하고 날라야 하고 기어이 오늘 일을 마쳐야 하는데, 철근을 나르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다. 건설 현장 잡부 일당 8만원, 매일매일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경쟁은 치열하다. 게다가 인력 사무실에 소개료도 내야한다. 만약 철근을 나르다가 다친다면 그것은 인부의 잘못으로 귀책되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밥을 얻기 위해 철근을 날라야 한다면 필살기를 동원해야 하지 않겠나.
“어깨를 퉁겨 철근을 슬쩍슬쩍 들어 올리”는 것이 당랑권 비술 중 철근을 들어 올리는 법이다. 어쩌면 극강의 당랑권 최고 비전 비술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어깨에 힘을 빼고 어깨를 퉁기니, 내 힘은 되도록 적게 쓴다. 그리고 철근의 무게중심까지 파고들어야 마침내 철근을 어깨에 메고 나아갈 수 있다. 철근의 무게중심까지 파고드는 것이 승리의 요결이다. 이로써 당랑권은 밥을 얻어낼 수 있는 비기의 무예, 정파와 사파를 아우르는 천하제일 고수의 무림 비급임이 증명된다.
그러나 슬프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아야 하고, 링 위에서 패배를 예감해야 하고, 기껏 밥 한 끼를 위해 철근을 날라야 한다. 당랑권이 필요하지 않은 날들이 오기는 올까? 그러나 믿어보자, 믿어야 한다. 그래서 당랑권을 우리 다음 세대에는 물려주지 않아야 한다. 무림의 세계는 무협지 속에서나 찾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