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와 해체의 무의미를 통한 변주-김근의 시세계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2014)
박정희(朴貞熙)
보편적 정서와는 그 내용이 사뭇 다른, 익숙하지 않은 시 읽기는 때로 신선할 수도 있고, 생경할 수도 있다. 김근의 시에서 우리는 주술과 방언, 혹은 의식 저편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관념을 버무린 다다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다다의 형식 파괴와 저항뿐만 아니라, 잠재된 무의식의 표출은 어쩌면 초현실의 극단적 관념을 독자에게 쏟아 붇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뉴월 장마 같은 관념과 무의식의 바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불필요한 다다와 초현실의 관념은 어쩌면 진부하기조차 하지만, 특정 단어의 연속나열이 주는 울림의 자극은 탄산수의 청량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작가의 무의식 기술은 뭔가를 의도한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스쳐가는 바람의 흔적이 있었던 것처럼, 혹은 없었던 것처럼, 혹은 호수 바닥 속으로 내려앉았을 지도 모른다. 호수 바닥에는 살 오른 조팝나무가 우아하게 기어 다니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옹알이들이 소리의 울림으로 다가오는 청량감이나, 더불어 강렬한 색깔과 의태어들의 나열, 그 대비는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공상과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버스가 덜,컹하는 찰나의 흔들림은 언어의 나열을 통해 이미지화되고, 그래서 무의미한 변주가 되지만 또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물 안의 여자」, 「빨강 빨강」, 「덜,컹」, 등의 시를 통해 언어, 색깔, 소리의 나열이 주는 무의미의 변주, 김근의 시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마을 물 안의 우물에서 물 안의 물 길어올리네
물안의 여자가 길어올린 우물물 물 안의 물 너무 많아 없는 거나 다름없네
…중략…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마을 물 안의 우물에서 끝도 없이 물 안의 물 길어올리네
물 안에서 물처럼 흘러가지 못하는 물 안의 여자 얼굴은 여태도 잘 길어올려지지 않네
―「물 안의 여자」 일부
이 시는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마을, 물 안의 우물”이 연속적 사방격자 무늬로 배열되고, 그것은 누군가를 지켜봐 주는 그림자이고 또한 그 그림자는 목마른 자에게 목을 축여주는 청량한 생명수가 된다. 아름다운 육각수 같은 큐빅으로도 전환된다. 이것은 단어가 주는 울림을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가능해 지는 일이다. 물 안에 내가 없고 물 안에 그 여자도 없었으며 마을은 당연히 존재한 적이 없다. 원래 없었으니 찾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의미 없기도 하지만 세상 일이 의미만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 의식 없이 길가다가 돌멩이를 걷어차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물 안의 물은 마시던지 마시지 않던지 마음대로이지만, 물 안의 물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 안의 것들을 되뇌이다 보면 변주들이 찾아와서 무언가를 던져주고 가는 것이다.
언어가 변주 되는 동안 김근은 색깔과 의태어의 합성을 통해 또 하나의 변주를 시도한다. 특정 색깔, 특히 빨강과 검정의 이미지는 팔짝팔짝·엉금엉금·맴맴 옹알이를 하며 정서적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피를 다 소진한 누리끼리한 염통이 저 혼자 바싹 마른 혈관을 흔들어대면서 골목 저편으로 사라진다 고통이 짜르르 따라간다 새까만 정거장에서 사내는 무당개구리처럼 배를 뒤집는다 배가 빨갛다 빨갛게 사내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돌기가 너무 많았다 말라간다 그는 곧 푸석푸석,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설령 제 색깔을 잃어버린 염통이 다시 돌아온대도 그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고통도 없이 빨강 빨강들이, 새까만 정거장 주변을 팔짝팔짝 뛰어다닐지 엉금엉금 기어다닐지 맴맴 돌지 어쩔지 모를 일은, 모를 일이다
―「빨강 빨강」 전문
우선 언어들을 뱉어냄으로써 시원하고, 빨강색 자극이 주는 쾌감은 불안하기도 하지만 주목을 받기도 하고 또한 이를 즐긴다. 강렬한 색채가 주는 자극과 이에 길들여진 대상의 시적 표현은 가학과 피학의 양끝을 내포하며 존재한다.
정거장 주변의 새까만 영상은 염통의 피에서 흐르는 빨강과 대비되어 괴기스럽다. 그러나 빨강은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고 무당개구리 같은 사내는 배를 뒤집는데 그 색깔은 빨갛다. 빨강이 주는 주목성은 검은 정거장에서 팔짝팔짝 뛰어다닐지 엉금엉금 기어다닐지 모른다. 어쩌면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연결도 없이 염통과 사내는 이어지고 빨갛게 말라간다. 팔딱팔딱 뛰어다니되, 맴맴 돌지 아니면 기어다닐 지도 모를 일을 작가는 중얼거린다. 빨강이 주는 강렬함으로 다가오는 이 시는 결국 바짝 마른 혈관에서 철철 흐르는 피이다.
이제 철철 흐르는 피로 무장한 우툴두툴한 시인의 무의식은 팔딱거리는 나비의 날개가 되어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없이 흐느적거린다. 그러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상상 속 퇴행으로 빠져든다.
팔달거리는 나비 날개 가루 한 알처럼 뿌려지다 허공에 잠시 멈춘 채로 타는 노을 앞에서 나 마냥 앉아 있고만, 해지고 해진 날들의 가구공장 삐걱거리는 경리 만나러 용인 황새울 가던 길 낯선 신작로에서 버스는 덜컹거리다 덜,에서 고장나 아직 껑, 하지 않은 순간에 서서 나아가지 않고 버스 안 차창에 기댄 노파의 멈춘 주름 사이로 길가 너른 밭 파꽃들 송두리째 옮겨가고 옮겨가 노을에 더욱 징그럽고 버스 곁을 지나던 아이들이 돌리던 신발주머니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히 맞선 지점에 걸려 달싹도 못하고 길들은 흐느적거리며 노을 속으로 뛰어들고 뛰어들어 젖고 젖어 아예는 빠져 죽고 길어지는 그늘 그늘의 바깥도 잠시 곁에 거느리고 마냥 앉아 있고만, …중략… 먼지 뒤집어쓰고 굴러다닐 나와 해지고 해진 날들의 가구공장 삐걱거리는 경리의 해골도 잊고 나 마냥 앉아 있고만, 멈췄던 그 모든 바깥을 들쳐업고 팔달거리는 나비 날개 가루 한 알처럼 아무도 모를 어딘가 내려앉아 땅거미에 묻히기 전까지 그때까지만 타는 노을 앞에서 나 마냥 앉아 있고만,
―「덜,컹」 일부
가구공장의 경리는 화자의 누구였을까. 누구이든지 간에 화자는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구공장 경리를 만나려 나비인양 황새울로 떠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파꽃이었고 노을이었고 노파의 주름진 세월이었다. 신발주머니 돌리는 유년은 노파의 주름 속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교차되어 만나고 있었다. 길들은 흐느적거리며 노을 속으로 뛰어들지만 그 길이 언제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시인이 찾아가던 용인 황새울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황새울에는 황새가 살지 않고 가구공장의 경리도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존재했던 길들이 서너 개쯤 알을 품고 있다.
보이는 것만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눈에 띄는 일상이 낯설게 다가올 때, 우리는 의식의 파장을 초점 없이 분사시키고 무의식 속으로 침잠한다. 우리가 용인 황새울에 가며 신발주머니 돌리는 아이들 꿈을 꾸는 것인지, 아이들의 꿈속에 우리가 등장인물이 되어 동네 사람 갑·을·병으로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황사 먼지 뿌연 봄날에 나비는 장자를 알지 못하고, 장자 또한 지난 겨울에 가을을 찾아 떠났다.
다다와 해체의 무의미를 통한 변주-김근의 시세계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2014)
박정희(朴貞熙)
보편적 정서와는 그 내용이 사뭇 다른, 익숙하지 않은 시 읽기는 때로 신선할 수도 있고, 생경할 수도 있다. 김근의 시에서 우리는 주술과 방언, 혹은 의식 저편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관념을 버무린 다다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다다의 형식 파괴와 저항뿐만 아니라, 잠재된 무의식의 표출은 어쩌면 초현실의 극단적 관념을 독자에게 쏟아 붇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뉴월 장마 같은 관념과 무의식의 바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느끼고 이해하는 것이 불필요한 다다와 초현실의 관념은 어쩌면 진부하기조차 하지만, 특정 단어의 연속나열이 주는 울림의 자극은 탄산수의 청량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작가의 무의식 기술은 뭔가를 의도한 것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냥 스쳐가는 바람의 흔적이 있었던 것처럼, 혹은 없었던 것처럼, 혹은 호수 바닥 속으로 내려앉았을 지도 모른다. 호수 바닥에는 살 오른 조팝나무가 우아하게 기어 다니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옹알이들이 소리의 울림으로 다가오는 청량감이나, 더불어 강렬한 색깔과 의태어들의 나열, 그 대비는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공상과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간다. 버스가 덜,컹하는 찰나의 흔들림은 언어의 나열을 통해 이미지화되고, 그래서 무의미한 변주가 되지만 또한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글에서는 「물 안의 여자」, 「빨강 빨강」, 「덜,컹」, 등의 시를 통해 언어, 색깔, 소리의 나열이 주는 무의미의 변주, 김근의 시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마을 물 안의 우물에서 물 안의 물 길어올리네
물안의 여자가 길어올린 우물물 물 안의 물 너무 많아 없는 거나 다름없네
…중략…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마을 물 안의 우물에서 끝도 없이 물 안의 물 길어올리네
물 안에서 물처럼 흘러가지 못하는 물 안의 여자 얼굴은 여태도 잘 길어올려지지 않네
―「물 안의 여자」 일부
이 시는 “물 안의 여자, 물 안의 마을, 물 안의 우물”이 연속적 사방격자 무늬로 배열되고, 그것은 누군가를 지켜봐 주는 그림자이고 또한 그 그림자는 목마른 자에게 목을 축여주는 청량한 생명수가 된다. 아름다운 육각수 같은 큐빅으로도 전환된다. 이것은 단어가 주는 울림을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가능해 지는 일이다. 물 안에 내가 없고 물 안에 그 여자도 없었으며 마을은 당연히 존재한 적이 없다. 원래 없었으니 찾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의미 없기도 하지만 세상 일이 의미만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 의식 없이 길가다가 돌멩이를 걷어차는 일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물 안의 물은 마시던지 마시지 않던지 마음대로이지만, 물 안의 물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물 안의 것들을 되뇌이다 보면 변주들이 찾아와서 무언가를 던져주고 가는 것이다.
언어가 변주 되는 동안 김근은 색깔과 의태어의 합성을 통해 또 하나의 변주를 시도한다. 특정 색깔, 특히 빨강과 검정의 이미지는 팔짝팔짝·엉금엉금·맴맴 옹알이를 하며 정서적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피를 다 소진한 누리끼리한 염통이 저 혼자 바싹 마른 혈관을 흔들어대면서 골목 저편으로 사라진다 고통이 짜르르 따라간다 새까만 정거장에서 사내는 무당개구리처럼 배를 뒤집는다 배가 빨갛다 빨갛게 사내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는 돌기가 너무 많았다 말라간다 그는 곧 푸석푸석,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설령 제 색깔을 잃어버린 염통이 다시 돌아온대도 그를 찾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고통도 없이 빨강 빨강들이, 새까만 정거장 주변을 팔짝팔짝 뛰어다닐지 엉금엉금 기어다닐지 맴맴 돌지 어쩔지 모를 일은, 모를 일이다
―「빨강 빨강」 전문
우선 언어들을 뱉어냄으로써 시원하고, 빨강색 자극이 주는 쾌감은 불안하기도 하지만 주목을 받기도 하고 또한 이를 즐긴다. 강렬한 색채가 주는 자극과 이에 길들여진 대상의 시적 표현은 가학과 피학의 양끝을 내포하며 존재한다.
정거장 주변의 새까만 영상은 염통의 피에서 흐르는 빨강과 대비되어 괴기스럽다. 그러나 빨강은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고 무당개구리 같은 사내는 배를 뒤집는데 그 색깔은 빨갛다. 빨강이 주는 주목성은 검은 정거장에서 팔짝팔짝 뛰어다닐지 엉금엉금 기어다닐지 모른다. 어쩌면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연결도 없이 염통과 사내는 이어지고 빨갛게 말라간다. 팔딱팔딱 뛰어다니되, 맴맴 돌지 아니면 기어다닐 지도 모를 일을 작가는 중얼거린다. 빨강이 주는 강렬함으로 다가오는 이 시는 결국 바짝 마른 혈관에서 철철 흐르는 피이다.
이제 철철 흐르는 피로 무장한 우툴두툴한 시인의 무의식은 팔딱거리는 나비의 날개가 되어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한없이 흐느적거린다. 그러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상상 속 퇴행으로 빠져든다.
팔달거리는 나비 날개 가루 한 알처럼 뿌려지다 허공에 잠시 멈춘 채로 타는 노을 앞에서 나 마냥 앉아 있고만, 해지고 해진 날들의 가구공장 삐걱거리는 경리 만나러 용인 황새울 가던 길 낯선 신작로에서 버스는 덜컹거리다 덜,에서 고장나 아직 껑, 하지 않은 순간에 서서 나아가지 않고 버스 안 차창에 기댄 노파의 멈춘 주름 사이로 길가 너른 밭 파꽃들 송두리째 옮겨가고 옮겨가 노을에 더욱 징그럽고 버스 곁을 지나던 아이들이 돌리던 신발주머니 원심력과 구심력이 팽팽히 맞선 지점에 걸려 달싹도 못하고 길들은 흐느적거리며 노을 속으로 뛰어들고 뛰어들어 젖고 젖어 아예는 빠져 죽고 길어지는 그늘 그늘의 바깥도 잠시 곁에 거느리고 마냥 앉아 있고만, …중략… 먼지 뒤집어쓰고 굴러다닐 나와 해지고 해진 날들의 가구공장 삐걱거리는 경리의 해골도 잊고 나 마냥 앉아 있고만, 멈췄던 그 모든 바깥을 들쳐업고 팔달거리는 나비 날개 가루 한 알처럼 아무도 모를 어딘가 내려앉아 땅거미에 묻히기 전까지 그때까지만 타는 노을 앞에서 나 마냥 앉아 있고만,
―「덜,컹」 일부
가구공장의 경리는 화자의 누구였을까. 누구이든지 간에 화자는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구공장 경리를 만나려 나비인양 황새울로 떠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파꽃이었고 노을이었고 노파의 주름진 세월이었다. 신발주머니 돌리는 유년은 노파의 주름 속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으로 교차되어 만나고 있었다. 길들은 흐느적거리며 노을 속으로 뛰어들지만 그 길이 언제 어느 곳에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시인이 찾아가던 용인 황새울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황새울에는 황새가 살지 않고 가구공장의 경리도 없었지만 언젠가부터 존재했던 길들이 서너 개쯤 알을 품고 있다.
보이는 것만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은 아니다. 눈에 띄는 일상이 낯설게 다가올 때, 우리는 의식의 파장을 초점 없이 분사시키고 무의식 속으로 침잠한다. 우리가 용인 황새울에 가며 신발주머니 돌리는 아이들 꿈을 꾸는 것인지, 아이들의 꿈속에 우리가 등장인물이 되어 동네 사람 갑·을·병으로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황사 먼지 뿌연 봄날에 나비는 장자를 알지 못하고, 장자 또한 지난 겨울에 가을을 찾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