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일탈을 통한 가학 - 김민정의 시세계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2014)
박정희(朴貞熙)
우리는 일상의 소소함이나 규범을 지킴으로써 편한 것들에 깃들어 살게 된다. 김민정의 시는 이렇게 편한 것들, 익숙한 것들에 대한 파괴와 저격의 실험을 보여주면서 일탈의 해방을 꿈꾼다. 익히 알고 있는 것에서 벗어난 시어와 구상의 파격은 시인의 자유를 향한 의지이기도 하고 가학을 통한 충족이기도 하다. 평범한 것, 일반적인 것, 상식적인 것에 대한 끝임 없는 도발은 격렬하다 못해 현란하고 모호하며 가학적이어서 마침내 아릿하게 눈물겹다. 지리하게 이어지는 시어의 파편들은 폐쇄된 의식의 탈구를 꿈꾸며 대담하게 배설되고 있다. 막혔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통해야 하는 것이리라. 「미혼과 마흔」, 「빨강에 고하다」, 「뜻하는 돌」, 「피날레」, 「숲에서 일어난 일」, 「언니라는 이름의 언짢음」 등의 시를 통해 김민정의 시세계로 들어가 보려한다.
시인의 시어를 통한 가학은 결핍에 대한 무의식적 보상심리로 해석된다. 결핍은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이나 연대할 수 없었던 무력감이기도 하다.
40년여 년 동안 어둠 깜깜할수록 더 빨강으로 더 환해 지던 엘로하우스의 안마당, 입대 전날 아빠의 동정도 머뭇러리다 여기와 묻혔다는데 지금이라도 캐갈 수 있을 까요? 돌아봤다 돌이 된 엄마가 돌아보지 마 신신당부했거늘 떨어뜨린 문학개론 주으려다 눈이 마주친 끽동 언니는 하이힐 끝으로 책장 위에 올라선 채 이렇게 말했다 뭘 째려 이 쌍년아, 너도 인하대 나가요지? 길 하나를 맞각으로 캠퍼스 저 푸른 잔디를 담요 삼아 끽동 언니들은 짝짝 껌을 씹어가며 딱딱 화투장을 쳐댔고 그러다 간질거러 죽을 지경이면 뒷물 세숫대야를 들고 나오 지나가던 여대생들을 향해 뿌려대곤 하였다 쟤들이 젤로 재수 없어 퉤, …(중략)… 어느날 끽동이요 했는데 택시에서 내리고 보니 학익동 새 아카느 단지였다 신호등 좀 건너다녔을 뿐인데 말이다
―「미혼과 마흔」 일부
연대할 수도 연민할 수도 없었던 무력감은 존재 그 자체를 고정시켜 두고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몸 안에 육화된 잔재로 남아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장막이 걷히고 ‘끽동’의 엘로하우스 안마당이 새 아파트가 빽빽한 ‘학익동’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화자가 해결할 수 없었던 무력감은 그렇게 또다른 무력감이 되어 그렇게 내 앞에 존재하며 기억을 불러내고 말았다. 이 무력감의 탈출을 위하여 시인은 내밀한 자신의 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며 특히 성적인 것들의 모티브를 통해 독자와의 은밀한 교감을 꾀하려 기도한다. “미안해, 불륜중이야!//화장실 변기 위에서 나는 오래 저린 엉덩이였다/미안해 생리중이야!// 발가벗은 채 나는 문밖 조간신문을 집고 있었고/ 눈 마주친 옆집 남자는 물린 빨간무였다/ 미안해, 식사 중이야”(「빨강에 고하다」). 상투적이지 않은 생경함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그의 의도가 관철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시인의 주장은 또렷하고 공격적이기 조차 하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적이고 내밀한 것들로 무력감을 해소해 보려해도 답답함은 여전하다. 결국 무거운 돌같은 것들이 짐짓 시인의 턱밑까지 찾아와 주변을 서성인다. 그것은 그리운 것인지 그립지 않은 것인지 모를 연민이다.
혼인빙자로 자살한 지 오래인 애인이
삼각대를 꺼내 좀 들어달라나요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심장에 누가 돌 매단 줄 알았습니다
절이 있었습니다
돌에 돌을 얹는 게 합장인 줄 알았습니다
돌을 훔쳤습니다
가방에 壽石인 줄 알았던 애인이
공항 휴지통에 돌을 좀 버리고 오라나요
인형도 아닌 그저 돌을 말입니다
―「뜻하는 돌」 일부
시인은 연민을 털어내기 위해 관념의 세계를 거닐며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다. 무의미의 나열 사이에 숨긴 작가의 고백은 안쓰럽다. 애인의 기억이 넘실댈 때 그 애인과의 기억이 사실이든 상상이든 어깨가 무거워진다. 절에 가서 합장하다가 합장은 돌이 되고 이 돌을 훔쳐다가 공항 휴지통에 버리는 행동에서 별도의 의미는 없다. 단지 무슨 행위든 행함으로써 자기치유를 꾀하고 있다. 돌이 뜻하는 것은 없다. 무거운 마음이라도 소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 행동인지 알지만, “혁대로 목을 조이는” 죽음의 의식을 통하여 무거운 돌들을 뽑아내려 한다.
혁대로 내 목을 조이는 걸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까
그는 떠났다
한 시인이 닭에게 그러했듯
나를 먹을 수는 있었으나
나를 잡을 수는 없었던
예민한 그였기 때문이리라
.....(중략)....
닭살을 긁은 뒤 울긋불긋 솟은
살진 여드름을 짜기에 더없이 좋았으므로
나는 내 안의 작디작은 죽음을 잊었다
그렇게 흔들흔들
안녕 새로운 나여
―「피날레」 일부
화자가 스스로를 해체하기 위해 자해하자, 그는 화자를 결코 잡을 수는 없기에 그저 떠났다. 잡을 수 없기에 결단코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억지로 먹는다는 건 ‘동의가 없는 것’, 동의가 없는 한 예민한 그에게 있어서 마음을 잡아 두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인 것이다. 예민한 그는 떠났고 남아 있는 나는 죽음 속에서 죽음을 잊고 새롭게 흔들거렸다. 새로운 나를 찾아온 시인은 ‘안녕’으로 인사하는데, 그 인사는 떠남이기도 하고 만남이기도 하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다 봄날의 꽃집 앞을 거닐게 되면, 향기를 잃은 조화(造花), 아니 그냥 그렇게 원래부터 향기가 존재하지 않은 조화 하나쯤 발견하게 되고, 시를 읽는 우리는 화자와 함께 아릿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내게로 벤자민고무나무를 배달시킨다.
어느 날 벤자민고무나무 한 그루
나에게서 나에게로 배달시켰다
고르고 보니
키가 딱 아홉 살 소년만 했다
흔들리고 싶을 때마다
흔들기 위해서였다
흔들고 난 뒤에는
안흔들렸다 손 흔들기 위해서였다
이게 이상인가 전심인가
......(중략)....
뒷짐 지고 산책이나 다녀올 일이었다
―「숲에서 일어난 일」 일부
시인은 왜 하필 벤자민고무나무를 흔들고 싶었을까? 흔들리지도 않고 흔들 필요도 없는 이 무의미한 행동은 시인이 시인 스스로에게 보낸 벤자민고무나무에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원래부터 그 나무는 존재하지 않았고 또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부작위의 행위는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냥 그대로 배회하고 있다. 하지만 빙산의 일각을 통해 나머지 전체의 빙산을 유추하려는 것이 시를 읽어내는 마음이다. 작자가 의도했던 안했던 우리는 그의 시에서 하릴없는 권태를 찾아낸다. 졸고 있을 때는 창문을 연다든지 죽비를 맞던지, 아니면 아예 벤자민고무나무를 흔드는 참선을 그만두고 차라리 잠을 자야 할 것이다. 왜 굳이 나무를 흔들며 ‘참선’을 하려는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쉽지 않음이다.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김민정은 의도적으로 엄숙함이나 단정함 등 절제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배제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자유로움을 만끽하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하는 일이 언어적 가학이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코딱지가 말라붙어 있더라/ 누군가 포스트이시에 갈겨 쓴 글씨/ 씨발아 너 언제 먹을래?/ CCTV 속에서도 나만 갖고 그러더라 일테면/ 맨 처음 언니들은 꼭 그렇게, 흥!”(「언니라는 이름의 언짢음」). 하루하루 옥죄어 오는 일상과 이에 대한 반작용은 불특정 다수와의 관념적 약속을 사정없이 깨뜨린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노력이 시를 읽는 이들과 얼마나 교감될 지는 의문이다. 자기 해체와 절제되지 않은 시어들이 다반사로 쏟아져 내릴 때, 시를 읽는 이들은 잠시 후련함을 느끼거나 대리만족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씁쓸함은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뭔가 개선될 미래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를 치유할 길이 아득한 시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연민이고 안타까움이다. 그것은 살아낼 길이 만만치 않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언어의 일탈을 통한 가학 - 김민정의 시세계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2014)
박정희(朴貞熙)
우리는 일상의 소소함이나 규범을 지킴으로써 편한 것들에 깃들어 살게 된다. 김민정의 시는 이렇게 편한 것들, 익숙한 것들에 대한 파괴와 저격의 실험을 보여주면서 일탈의 해방을 꿈꾼다. 익히 알고 있는 것에서 벗어난 시어와 구상의 파격은 시인의 자유를 향한 의지이기도 하고 가학을 통한 충족이기도 하다. 평범한 것, 일반적인 것, 상식적인 것에 대한 끝임 없는 도발은 격렬하다 못해 현란하고 모호하며 가학적이어서 마침내 아릿하게 눈물겹다. 지리하게 이어지는 시어의 파편들은 폐쇄된 의식의 탈구를 꿈꾸며 대담하게 배설되고 있다. 막혔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통해야 하는 것이리라. 「미혼과 마흔」, 「빨강에 고하다」, 「뜻하는 돌」, 「피날레」, 「숲에서 일어난 일」, 「언니라는 이름의 언짢음」 등의 시를 통해 김민정의 시세계로 들어가 보려한다.
시인의 시어를 통한 가학은 결핍에 대한 무의식적 보상심리로 해석된다. 결핍은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소통이나 연대할 수 없었던 무력감이기도 하다.
40년여 년 동안 어둠 깜깜할수록 더 빨강으로 더 환해 지던 엘로하우스의 안마당, 입대 전날 아빠의 동정도 머뭇러리다 여기와 묻혔다는데 지금이라도 캐갈 수 있을 까요? 돌아봤다 돌이 된 엄마가 돌아보지 마 신신당부했거늘 떨어뜨린 문학개론 주으려다 눈이 마주친 끽동 언니는 하이힐 끝으로 책장 위에 올라선 채 이렇게 말했다 뭘 째려 이 쌍년아, 너도 인하대 나가요지? 길 하나를 맞각으로 캠퍼스 저 푸른 잔디를 담요 삼아 끽동 언니들은 짝짝 껌을 씹어가며 딱딱 화투장을 쳐댔고 그러다 간질거러 죽을 지경이면 뒷물 세숫대야를 들고 나오 지나가던 여대생들을 향해 뿌려대곤 하였다 쟤들이 젤로 재수 없어 퉤, …(중략)… 어느날 끽동이요 했는데 택시에서 내리고 보니 학익동 새 아카느 단지였다 신호등 좀 건너다녔을 뿐인데 말이다
―「미혼과 마흔」 일부
연대할 수도 연민할 수도 없었던 무력감은 존재 그 자체를 고정시켜 두고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들은 내 몸 안에 육화된 잔재로 남아 어디론가 사라졌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장막이 걷히고 ‘끽동’의 엘로하우스 안마당이 새 아파트가 빽빽한 ‘학익동’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화자가 해결할 수 없었던 무력감은 그렇게 또다른 무력감이 되어 그렇게 내 앞에 존재하며 기억을 불러내고 말았다. 이 무력감의 탈출을 위하여 시인은 내밀한 자신의 의식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며 특히 성적인 것들의 모티브를 통해 독자와의 은밀한 교감을 꾀하려 기도한다. “미안해, 불륜중이야!//화장실 변기 위에서 나는 오래 저린 엉덩이였다/미안해 생리중이야!// 발가벗은 채 나는 문밖 조간신문을 집고 있었고/ 눈 마주친 옆집 남자는 물린 빨간무였다/ 미안해, 식사 중이야”(「빨강에 고하다」). 상투적이지 않은 생경함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그의 의도가 관철되던 그렇지 않던 간에 시인의 주장은 또렷하고 공격적이기 조차 하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적이고 내밀한 것들로 무력감을 해소해 보려해도 답답함은 여전하다. 결국 무거운 돌같은 것들이 짐짓 시인의 턱밑까지 찾아와 주변을 서성인다. 그것은 그리운 것인지 그립지 않은 것인지 모를 연민이다.
혼인빙자로 자살한 지 오래인 애인이
삼각대를 꺼내 좀 들어달라나요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심장에 누가 돌 매단 줄 알았습니다
절이 있었습니다
돌에 돌을 얹는 게 합장인 줄 알았습니다
돌을 훔쳤습니다
가방에 壽石인 줄 알았던 애인이
공항 휴지통에 돌을 좀 버리고 오라나요
인형도 아닌 그저 돌을 말입니다
―「뜻하는 돌」 일부
시인은 연민을 털어내기 위해 관념의 세계를 거닐며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다. 무의미의 나열 사이에 숨긴 작가의 고백은 안쓰럽다. 애인의 기억이 넘실댈 때 그 애인과의 기억이 사실이든 상상이든 어깨가 무거워진다. 절에 가서 합장하다가 합장은 돌이 되고 이 돌을 훔쳐다가 공항 휴지통에 버리는 행동에서 별도의 의미는 없다. 단지 무슨 행위든 행함으로써 자기치유를 꾀하고 있다. 돌이 뜻하는 것은 없다. 무거운 마음이라도 소통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 행동인지 알지만, “혁대로 목을 조이는” 죽음의 의식을 통하여 무거운 돌들을 뽑아내려 한다.
혁대로 내 목을 조이는 걸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까
그는 떠났다
한 시인이 닭에게 그러했듯
나를 먹을 수는 있었으나
나를 잡을 수는 없었던
예민한 그였기 때문이리라
.....(중략)....
닭살을 긁은 뒤 울긋불긋 솟은
살진 여드름을 짜기에 더없이 좋았으므로
나는 내 안의 작디작은 죽음을 잊었다
그렇게 흔들흔들
안녕 새로운 나여
―「피날레」 일부
화자가 스스로를 해체하기 위해 자해하자, 그는 화자를 결코 잡을 수는 없기에 그저 떠났다. 잡을 수 없기에 결단코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억지로 먹는다는 건 ‘동의가 없는 것’, 동의가 없는 한 예민한 그에게 있어서 마음을 잡아 두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인 것이다. 예민한 그는 떠났고 남아 있는 나는 죽음 속에서 죽음을 잊고 새롭게 흔들거렸다. 새로운 나를 찾아온 시인은 ‘안녕’으로 인사하는데, 그 인사는 떠남이기도 하고 만남이기도 하다. 새로운 길을 찾으려다 봄날의 꽃집 앞을 거닐게 되면, 향기를 잃은 조화(造花), 아니 그냥 그렇게 원래부터 향기가 존재하지 않은 조화 하나쯤 발견하게 되고, 시를 읽는 우리는 화자와 함께 아릿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내게로 벤자민고무나무를 배달시킨다.
어느 날 벤자민고무나무 한 그루
나에게서 나에게로 배달시켰다
고르고 보니
키가 딱 아홉 살 소년만 했다
흔들리고 싶을 때마다
흔들기 위해서였다
흔들고 난 뒤에는
안흔들렸다 손 흔들기 위해서였다
이게 이상인가 전심인가
......(중략)....
뒷짐 지고 산책이나 다녀올 일이었다
―「숲에서 일어난 일」 일부
시인은 왜 하필 벤자민고무나무를 흔들고 싶었을까? 흔들리지도 않고 흔들 필요도 없는 이 무의미한 행동은 시인이 시인 스스로에게 보낸 벤자민고무나무에게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원래부터 그 나무는 존재하지 않았고 또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부작위의 행위는 무의식의 공간에서 그냥 그대로 배회하고 있다. 하지만 빙산의 일각을 통해 나머지 전체의 빙산을 유추하려는 것이 시를 읽어내는 마음이다. 작자가 의도했던 안했던 우리는 그의 시에서 하릴없는 권태를 찾아낸다. 졸고 있을 때는 창문을 연다든지 죽비를 맞던지, 아니면 아예 벤자민고무나무를 흔드는 참선을 그만두고 차라리 잠을 자야 할 것이다. 왜 굳이 나무를 흔들며 ‘참선’을 하려는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이 쉽지 않음이다.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김민정은 의도적으로 엄숙함이나 단정함 등 절제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배제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다. 자유로움을 만끽하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하는 일이 언어적 가학이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를 향한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코딱지가 말라붙어 있더라/ 누군가 포스트이시에 갈겨 쓴 글씨/ 씨발아 너 언제 먹을래?/ CCTV 속에서도 나만 갖고 그러더라 일테면/ 맨 처음 언니들은 꼭 그렇게, 흥!”(「언니라는 이름의 언짢음」). 하루하루 옥죄어 오는 일상과 이에 대한 반작용은 불특정 다수와의 관념적 약속을 사정없이 깨뜨린다.
그러나 시인의 이러한 노력이 시를 읽는 이들과 얼마나 교감될 지는 의문이다. 자기 해체와 절제되지 않은 시어들이 다반사로 쏟아져 내릴 때, 시를 읽는 이들은 잠시 후련함을 느끼거나 대리만족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씁쓸함은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뭔가 개선될 미래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를 치유할 길이 아득한 시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연민이고 안타까움이다. 그것은 살아낼 길이 만만치 않은 우리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