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존재적 관조와 달관, 전복과 해학이 깃든 우수 - 전동균의 시세계 『우리처럼 낯선』(2014)
박정희(朴貞熙)
전동균 시집 『우리처럼 낯선』을 관통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반전과 전복 그리고 해학이 버무려진 삶의 관조 내지 달관의 태도이다. 그는 사뭇 비장하게 우울과 우수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시상을 전개하다가, 예상 못한 결말을 보임으로써 긴장의 해소와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남루하지만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달관한 전복을 통해 극대화되었다.
전동균의 시집 『우리처럼 낯선』은 1부에서는 시적 긴장감과 여운이 남는 화려한 수사를 통해 대체적으로 의미의 전달에 성공한다. 그러나 2부와 3부로 진행될수록 연상과 간섭, 표현의 관념성과 상투성이 엿보인다. 표현기법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서사 구조가 약해짐으로써 시적 탄력성을 잃고 이야기의 힘이 부족해졌다는 아쉬움이 남는다(「소만」, 「시월이어서」). 만연체의 다소 산만함이 함축적 긴장감을 떨어뜨린 것이다(「사순절 밤에, 밤은」, 「오줌줄기나 실컷」).
그러나 그의 시에는 시적 대상에 대한 존재로서의 성찰을 통한 자연스러운 시상의 전개와 단어를 조탁하는 미덕이 있다. 이는 시의 감칠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전복과 해학이라는 허허실실의 날카로운 단도에 일상의 단조로움과 관성이 베어진다.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우수에 깃든 삶의 관조를 「먼 나무에게로」, 「춘삼월을 건너는 법」, 「낮술 몇잔」, 「우리처럼 낯선」를 통하여 살펴본다.
“좀 멀긴 합니다 신발을 벗고 몰려오는 구름들과/ 물결치는 돌들의 골짜기를 지나야 하죠/ 땅 속으로 꺼진 무덤들/ 시장 난전의 손바닥 같은/ 바람의 비문을 읽어야 해요// 일생동안 쌀 닷말 지고 가는 사람, 우리는/ 아침에 얼어붙은 강을 지났으나/ 밤에도 강가에서 노숙하는 사람// 중략// 아흔아홉 설산 너머 무지개공원의 늘 푸른 나무/ 공원보신탕 입구 개사슬 묶인/ 으렁 으렁 먼나무 (「먼 나무에게로」 일부)”
전동균은 삶의 우수와 고뇌를 “신성한 나무”를 찾아가는 고통으로 그리고 있다. 한평생을 “쌀 닷말”로 살아내야 하는 일상의 누추함은 추운 겨울날 아침을 도와 강을 건너는 고통을 감내하지만, 결국 밤이 되어도 그 강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원의 한계에 맞닥뜨린다. 그러나 “한밤 강가에서의 노숙”은, 결국 “아흔아홉 설산 너머 무지개공원의 늘 푸른나무”에 도달한다. 삶의 고단함은 고통을 지나 무지개가 깃든 상록수에 다다른다. 갈라진 논바닥 위로 싱싱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며 은어처럼 퍼덕일 때 삶이 살아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통속에 다다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동균의 반전과 해학이 슬그머니 묘수를 내놓는다. “공원보신탕 입구 개사슬 묶인 으렁 으렁 먼나무”, 반전으로 상식과 통속을 저만치 밀쳐놓고 먼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눈물 섞인 헛헛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아니 웃어야 한다. 을씨년스럽지만 결코 발을 동동 구를 것 같지는 않은, 작자와의 음험한 동조이다.
“꽃들만 왔다 가는 기라 쓸데없이//떨고 있는 창문들/ 어디론가 끝없이 걸어가는 의자들/ 밤이면 아스팔트를 뚫고 달려오는 /초록 이리떼 울부짖음//쌀통만 바닥나고 있는 기라/ 제 모습을 멀뚱멀뚱 비춰보는 연못의/ 구름의 혓바닥만 마르고 있는 거라//전생을, 전생에 맡겨둔 물건을 찾아오듯/ 햇볕을 나르는 손들은/ 절벽과 마주 선 절벽이거나/휘몰아치는 급류를 감춘 적막의 형제들// 아무도 데려가진 못할 기라 귀신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기라/그렇게 믿는 기라 그래야 사는 기라//(...)// 그냥 친구들끼리 야유회 하듯 지나가는 기라/ 술 진탕 마시고 목청껏 노래 몇자락 불러제끼고 /미안함다, 인사 한번 꾸벅하는/ 꽁지머리 바람처럼(「춘삼월을 건너는 법」에서)”
음험한 동조로 춘삼월을 맞은 화자는 쌀쌀하되 쌀쌀하지 않고 따뜻하되 따뜻하지 않은 춘삼월의 대책 없음을, “떨고 있는 창문들과 밤이면 아스팔트를 뚫고 달려오는 초록 이리떼 울부짖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쌀통은 바닥나고” 있고 “햇빛을 나르는 손들은” “휘몰아치는 급류” 속에 잠겨간다. 그러면서도 작자는 “아무도, 귀신조차도 데려가지 못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낙관, 즉 봄이 오는 춘삼월을 춘곤증 같은 귀찮은 존재들 쯤으로, 그러나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미안함다”라고 인사 한번 하고 슬쩍 눙치는 “꽁지머리 바람”은, 술 진탕 마시고 목청껏 노래하는 화자의 민망함을 대신해 준다. 세상이 시끄럽게 굴러가도 봄은 오고 또 갈 것이므로 그는 살아내는 비법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야 사는 것이라고. 전동균은 누추하고 때로는 비굴하기조차 한 삶을, 연못만 멀뚱멀뚱 바라보거나 마르고 있는 구름의 혓바닥을 바라보며 견뎌내고 있는데, 거기에는 의도적으로 덜 무겁게 사는 법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야유회를 가듯 춘삼월을 견뎌낸다면 일상의 버거움도 슬쩍 지나갈 것이다.
“휴가를 얻어도 갈 데 없는/ 이 게으르고 남루한 생은/ 탁발 나왔다가 주막집 불목하니가 되어버린 땡추같은 것,/ 맨 정신으로는 도무지 제 낯짝을 마주 볼 수 없어/ 마른 풀과 더불어/ 낮술 몇잔 나누는 것인데// 아 좋구나, 이 가을날/ 허물고 떠나야 할 집도 없는 나는/ 세상에 나와/ 낭끝 같은, 부서질수록 환한 낭끝의 파도 같은 여자의 눈을/ 내 것인 양 껴안은 죄밖에 없으니// 산 자와 죽은 이의 숨소리가 함부로 뒤섞여/달아오른 바람을 마시면서/ 덤불의 새들이나 놀래켜 훝는 거라,/ 떨어지는 대추알이며 그만큼 낮아지는 하늘들이며 / 수많은 헛것들 지나간 뒤에/ 잠시 커지는 물소리를 향해/ 큰절 올리는 시늉도 두어번, 괜히 (「낮술 몇잔」 부분).”
춘삼월의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겼지만, 남루한 생의 자학을 낮술 몇 잔에 떨쳐버리고 싶었다. 탁발 나왔다가 주막에서 불목하니가 되어버린 땡추의 자학인지도 모른다. 부서질수록 환한 그 여자의 눈을 남몰래 껴안은 땡추는, 한껏 달아오른 바람을 마시며 하릴없이 덤불 속 새를 놀래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물소리는 커지고 커지는 물소리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데, 속마음을 들켜버려 괜히 올리는 사과이리라.
삶이 이유가 있어서 살아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 괜히 애꿎은 길가 돌멩이를 발로 차보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만지작거리기도 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우수는 인간의 육체가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이기도 하고 아울러 초극에의 염원이기도 하다. 땡초 아닌 삶이 어디 있을까. 히말라야 설산의 고승대덕이나 어쩌면 부처님조차도, 늦가을 날 햇발이 헤진 부채살처럼 늘어질 때면 낮술 한잔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전동균이 차지한 주막의 부뚜막에는 곰삭은 젓갈로 눅눅하게 담근 총각김치가 한참동안 익고 있을 게다.
“꼭 지켜야 할 약속이, 무슨 좋은 일이 있어 온 건 아니에요 우연히, 누가 부르는 듯해서 찾아왔을 뿐이죠 누군지 모르지만// (...) 그냥 웃게 해주세요 지금 구르고 있는 공은 계속 굴러가게 하고 지금 먹고 있는 라면을 맛있게 먹게 해주세요/ 꽃밭의 꽃들 앞에 앉아 있게 해주세요/ 꽃들이 피어 있는 동안은(「우리처럼 낯선」)”
곰삭은 젓갈과 총각김치가 익어가는 동안,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라고 강조한다. 그것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니까, 그것들이 살아 숨쉬는 이유이니까. 이제 그는 달관의 경지에서 우주를 관조하며 신의 섭리로 다가가고 있다.
삶의 존재적 관조와 달관, 전복과 해학이 깃든 우수 - 전동균의 시세계 『우리처럼 낯선』(2014)
박정희(朴貞熙)
전동균 시집 『우리처럼 낯선』을 관통하는 것은, 사물에 대한 반전과 전복 그리고 해학이 버무려진 삶의 관조 내지 달관의 태도이다. 그는 사뭇 비장하게 우울과 우수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시상을 전개하다가, 예상 못한 결말을 보임으로써 긴장의 해소와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남루하지만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달관한 전복을 통해 극대화되었다.
전동균의 시집 『우리처럼 낯선』은 1부에서는 시적 긴장감과 여운이 남는 화려한 수사를 통해 대체적으로 의미의 전달에 성공한다. 그러나 2부와 3부로 진행될수록 연상과 간섭, 표현의 관념성과 상투성이 엿보인다. 표현기법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서사 구조가 약해짐으로써 시적 탄력성을 잃고 이야기의 힘이 부족해졌다는 아쉬움이 남는다(「소만」, 「시월이어서」). 만연체의 다소 산만함이 함축적 긴장감을 떨어뜨린 것이다(「사순절 밤에, 밤은」, 「오줌줄기나 실컷」).
그러나 그의 시에는 시적 대상에 대한 존재로서의 성찰을 통한 자연스러운 시상의 전개와 단어를 조탁하는 미덕이 있다. 이는 시의 감칠맛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전복과 해학이라는 허허실실의 날카로운 단도에 일상의 단조로움과 관성이 베어진다. 그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우수에 깃든 삶의 관조를 「먼 나무에게로」, 「춘삼월을 건너는 법」, 「낮술 몇잔」, 「우리처럼 낯선」를 통하여 살펴본다.
“좀 멀긴 합니다 신발을 벗고 몰려오는 구름들과/ 물결치는 돌들의 골짜기를 지나야 하죠/ 땅 속으로 꺼진 무덤들/ 시장 난전의 손바닥 같은/ 바람의 비문을 읽어야 해요// 일생동안 쌀 닷말 지고 가는 사람, 우리는/ 아침에 얼어붙은 강을 지났으나/ 밤에도 강가에서 노숙하는 사람// 중략// 아흔아홉 설산 너머 무지개공원의 늘 푸른 나무/ 공원보신탕 입구 개사슬 묶인/ 으렁 으렁 먼나무 (「먼 나무에게로」 일부)”
전동균은 삶의 우수와 고뇌를 “신성한 나무”를 찾아가는 고통으로 그리고 있다. 한평생을 “쌀 닷말”로 살아내야 하는 일상의 누추함은 추운 겨울날 아침을 도와 강을 건너는 고통을 감내하지만, 결국 밤이 되어도 그 강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근원의 한계에 맞닥뜨린다. 그러나 “한밤 강가에서의 노숙”은, 결국 “아흔아홉 설산 너머 무지개공원의 늘 푸른나무”에 도달한다. 삶의 고단함은 고통을 지나 무지개가 깃든 상록수에 다다른다. 갈라진 논바닥 위로 싱싱한 빗줄기가 쏟아져 내리며 은어처럼 퍼덕일 때 삶이 살아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통속에 다다른다.
하지만 여기에서 전동균의 반전과 해학이 슬그머니 묘수를 내놓는다. “공원보신탕 입구 개사슬 묶인 으렁 으렁 먼나무”, 반전으로 상식과 통속을 저만치 밀쳐놓고 먼 나무를 바라볼 때 우리는 눈물 섞인 헛헛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아니 웃어야 한다. 을씨년스럽지만 결코 발을 동동 구를 것 같지는 않은, 작자와의 음험한 동조이다.
“꽃들만 왔다 가는 기라 쓸데없이//떨고 있는 창문들/ 어디론가 끝없이 걸어가는 의자들/ 밤이면 아스팔트를 뚫고 달려오는 /초록 이리떼 울부짖음//쌀통만 바닥나고 있는 기라/ 제 모습을 멀뚱멀뚱 비춰보는 연못의/ 구름의 혓바닥만 마르고 있는 거라//전생을, 전생에 맡겨둔 물건을 찾아오듯/ 햇볕을 나르는 손들은/ 절벽과 마주 선 절벽이거나/휘몰아치는 급류를 감춘 적막의 형제들// 아무도 데려가진 못할 기라 귀신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기라/그렇게 믿는 기라 그래야 사는 기라//(...)// 그냥 친구들끼리 야유회 하듯 지나가는 기라/ 술 진탕 마시고 목청껏 노래 몇자락 불러제끼고 /미안함다, 인사 한번 꾸벅하는/ 꽁지머리 바람처럼(「춘삼월을 건너는 법」에서)”
음험한 동조로 춘삼월을 맞은 화자는 쌀쌀하되 쌀쌀하지 않고 따뜻하되 따뜻하지 않은 춘삼월의 대책 없음을, “떨고 있는 창문들과 밤이면 아스팔트를 뚫고 달려오는 초록 이리떼 울부짖음”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쌀통은 바닥나고” 있고 “햇빛을 나르는 손들은” “휘몰아치는 급류” 속에 잠겨간다. 그러면서도 작자는 “아무도, 귀신조차도 데려가지 못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낙관, 즉 봄이 오는 춘삼월을 춘곤증 같은 귀찮은 존재들 쯤으로, 그러나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미안함다”라고 인사 한번 하고 슬쩍 눙치는 “꽁지머리 바람”은, 술 진탕 마시고 목청껏 노래하는 화자의 민망함을 대신해 준다. 세상이 시끄럽게 굴러가도 봄은 오고 또 갈 것이므로 그는 살아내는 비법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그래야 사는 것이라고. 전동균은 누추하고 때로는 비굴하기조차 한 삶을, 연못만 멀뚱멀뚱 바라보거나 마르고 있는 구름의 혓바닥을 바라보며 견뎌내고 있는데, 거기에는 의도적으로 덜 무겁게 사는 법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야유회를 가듯 춘삼월을 견뎌낸다면 일상의 버거움도 슬쩍 지나갈 것이다.
“휴가를 얻어도 갈 데 없는/ 이 게으르고 남루한 생은/ 탁발 나왔다가 주막집 불목하니가 되어버린 땡추같은 것,/ 맨 정신으로는 도무지 제 낯짝을 마주 볼 수 없어/ 마른 풀과 더불어/ 낮술 몇잔 나누는 것인데// 아 좋구나, 이 가을날/ 허물고 떠나야 할 집도 없는 나는/ 세상에 나와/ 낭끝 같은, 부서질수록 환한 낭끝의 파도 같은 여자의 눈을/ 내 것인 양 껴안은 죄밖에 없으니// 산 자와 죽은 이의 숨소리가 함부로 뒤섞여/달아오른 바람을 마시면서/ 덤불의 새들이나 놀래켜 훝는 거라,/ 떨어지는 대추알이며 그만큼 낮아지는 하늘들이며 / 수많은 헛것들 지나간 뒤에/ 잠시 커지는 물소리를 향해/ 큰절 올리는 시늉도 두어번, 괜히 (「낮술 몇잔」 부분).”
춘삼월의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겼지만, 남루한 생의 자학을 낮술 몇 잔에 떨쳐버리고 싶었다. 탁발 나왔다가 주막에서 불목하니가 되어버린 땡추의 자학인지도 모른다. 부서질수록 환한 그 여자의 눈을 남몰래 껴안은 땡추는, 한껏 달아오른 바람을 마시며 하릴없이 덤불 속 새를 놀래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물소리는 커지고 커지는 물소리를 향해 큰절을 올리는데, 속마음을 들켜버려 괜히 올리는 사과이리라.
삶이 이유가 있어서 살아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니 괜히 애꿎은 길가 돌멩이를 발로 차보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만지작거리기도 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우수는 인간의 육체가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이기도 하고 아울러 초극에의 염원이기도 하다. 땡초 아닌 삶이 어디 있을까. 히말라야 설산의 고승대덕이나 어쩌면 부처님조차도, 늦가을 날 햇발이 헤진 부채살처럼 늘어질 때면 낮술 한잔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전동균이 차지한 주막의 부뚜막에는 곰삭은 젓갈로 눅눅하게 담근 총각김치가 한참동안 익고 있을 게다.
“꼭 지켜야 할 약속이, 무슨 좋은 일이 있어 온 건 아니에요 우연히, 누가 부르는 듯해서 찾아왔을 뿐이죠 누군지 모르지만// (...) 그냥 웃게 해주세요 지금 구르고 있는 공은 계속 굴러가게 하고 지금 먹고 있는 라면을 맛있게 먹게 해주세요/ 꽃밭의 꽃들 앞에 앉아 있게 해주세요/ 꽃들이 피어 있는 동안은(「우리처럼 낯선」)”
곰삭은 젓갈과 총각김치가 익어가는 동안,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달라고 강조한다. 그것들이 존재하는 이유이니까, 그것들이 살아 숨쉬는 이유이니까. 이제 그는 달관의 경지에서 우주를 관조하며 신의 섭리로 다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