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1898~1961)


1910년 협동학교 수학 중 한일합병이 되자 ‘忠君愛國(충군애국)’ 네 글자를 혈서하며 조국 광복에 헌신하기로 맹세하였다.  1919년 3 ·1운동 당시 서울과 안동의 만세운동을 사전부터 준비한 뒤 참여하여 제령위반(制令違反)죄로 쫓겼다. 군사력  확보를 위해 가산 정리 후 만주로 탈출하였다. 서로군정서에 가담했으며 군자금 모금을 위한 비밀특파원으로 국내에 두 번 입국하였다.

1925년 중국 국립성도대학교 사범부 문과를 졸업한 다음, 대구에서 진우연맹이 결성되자 방한상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고 폭탄 및 무기 반입을 도모했다. 1926년 광동기계공인총동맹을 통해 10만 노동자를 조직 지도하며 신디칼리스트의 광동 의거에 참여하였다. 1929년 북만주 해림에서 김좌진과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며, 공산주의자들의 민족진영 침투에 대항하기 위해 아나키즘으로 무장할 것을 역설하였다. 1929년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전개되자 이때 봉기한 2백여 명의 학생을 모아, 1930년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의성숙’을 창립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9년 최초의 전국 단위 아나키즘 조직인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으나 1931년 체포되어 5년간 만기 복역 후 1937년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다.

대전 감옥에서 복역 중 일제는 유림을 회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외아들이 결핵에 걸려 요양 중임을 상기시킨 교회사(敎誨師)는,

 “유 선생, 외아들이 폐병으로 다 죽어가고 있소. 앞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서약만 한다면, 외아들의 치료를 위해 유 선생을 가석방시키도록 노력하겠소.”
“내 자식이 죽더라도 내가 출소하면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자식을 팔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선생이 밖에 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단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편으로 독립운동을 안하겠다고 한마디만 할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임시방편으로라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바른 말을 하고 여기서 죽을지언정 거짓말을 하고 나갈 수는 없다.”

그 당시 대전 감옥의 간수는 유림의 민족해방과 인류평화의 열정에 감복하여 그 직을 그만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유림은 외아들 원식이 일본군 장교를 지냈다는 이유로 평생 상면을 거부했다. 자신이 독립운동 하는 동안 외아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 일제의 앞잡이로 만들었다고, 부인도 책망하며 물리치고 1961년 서거할 때까지 홀몸으로 지냈다. 

유림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개인으로 살기 위한 유림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때문에 살고 있는 유림이다. 

내가 가정에 얽매일 유림이냐?”
드높은 기개와 지조를 드러내는 일화이다.

아나키즘 진영을 대표하여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됨으로써, 우파 일색이던 임시정부가 좌익 우익 아나키즘  연합전선을 전개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마지막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대표 발의해 통과시키고 그 머리말도 제정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민주공화정의 체제를 가다듬었다. 1945년 환국 직전 임시정부 해산 논의가 일자 3.1운동의 결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들어 끝까지 옹호하였다. 아울러 당면정책 기초위원으로서 '임시정부 당면정책 14개항'을 제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해방정국 대책을 수립하였다. 


1946년 경남 안의에서 개최된 ‘전국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의 의장으로서, 정당 결성을 의결함과 동시에 아나키즘을 자율정부주의로 정의하였다. 이 대회 결과 아나키스트가 주축이 된 독립노농당이 창당되어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는 한국아나키스트들이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해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서 세계 아나키즘 역사상 가장 주목 받는 일대 사건이다. 독립노농당은 미 군정과 소련 군정 반대, 친일파 처단, 토지의 무상 몰수 무상 분배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1백만의 당세를 자부하며 해방정국 최대의 정당으로 급부상하였다.

1948년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해 대표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을 확대 계승한 대한국민회(국민의회) 의장에 피선되었다.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된 다음 이승만 독재에 항거 투쟁하였다. 해방정국에서 그와 독립노농당의 정치 노선은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반외세 신탁통치 반대, 단독 정부수립 반대, 평양회담 반대, 반독재 투쟁 등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특히 김구, 김규식 등과 탁치 반대 및 단정 수립 반대를 함께 했으면서도 그들이 김일성과 개최한 평양회담에 반대하였다. 평양회담이 아니라 이 나라의 수도인 서울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혁명 정파들이 모여 민족의 장래를 우리 힘으로 결정하자고 촉구했다. 자주 민주 통일에의 열정과 함께 공산 정권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한국민주당과 이승만의 수구세력, 박헌영의 공산주의 세력, 여운형의 중도좌파 세력, 김규식의 중도우파 세력, 김구의 보수 민족주의 우파 세력과 차별되는 유림과 독립노농당 중심의 아나키즘 진영 노선은 실현 가능성 여부에 앞서 우리 민족이 취해야 했던 최선의 방책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해석과 각 진영의 정치 노선은 민족의 진로들 두고 전개한 이데올로기 대논쟁이었다.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어느 정파와 이념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해방정국의 의미와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유림은 민족해방과 통일뿐만 아니라 상호 연대에 의한 인류애를 도모하며 아나키즘의 지평을 확장했다.
이론 전개와 대중 기반 결합을 통하여 실현 가능한 정치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을 모색한 선구자이다. 

아나키즘 정당 창당을 통해 변혁운동의 방향을 제시한 세계 아나키즘 운동사의 걸출한 인물이다.

 

신채호(1880~1936)


어릴 때 한학을 배우고 19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황성신문의 논설위원, 이듬 해에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서자 전원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됐으나 사임하고, 임시정부의 외교론 준비론 위주의 노선에 반대하여 무력 투쟁을 주장하였다.
1919년 2월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에 대한 위임통치를 요청하는 공한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1919년 8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그를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1923년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였는데, 아나키즘 원리로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민족의 정치 억압자이자 경제 착취자인 일본의 강제 권력을 적으로 간주하고 단호히 결전을 선포하였다. 아울러 민족해방운동을 민중해방운동과 동일시하며 혁명 방법으로 민중 봉기와 파괴를 강조했다. 창조를 위한 정열로 부조리하고 낡은 질서의 타파를 역설한 반강권주의 선언이다.


박열(1902~납북)과 금자문자(1904~1926)


1923년 일본 황태자 살해 음모 사건으로 인하여 박열과 금자문자 부부는 1926년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천황의 특사로 감형 받아 무기징역으로 복역 중에 금자문자가 의문의 옥중사를 당했다. 옥중 결혼식을 올렸는지 여부와  옥중 임신설이 의문사의 원인이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집권당이 반대당의 정략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그 원인 제거를 위해 금자문자의 교살을 사주했다고 짐작된다.

박열과 금자문자 부부는 조선의 예복을 입고 재판정과 맞서는 법정 투쟁을 전개하였다. 공판정에서 일체의 죄인 대우를 하지 말고 조선 옷을 입게 해 줄 것과, 아울러 재판정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하며 공판 시작 전에는 자신의 선언문을 낭독하겠다고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박열은 사형 언도를 받고도 “몸뚱이는 마음대로 죽이라, 그러나 나의 마음이야 어찌할 수 있겠느냐” 며 의연하였다. 금자문자 역시 “박열과 함께 죽는 것을 가장 만족히 여기는 바이다”라며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였다.
박열과 금자문자의 투쟁은 아나키즘 운동사에 길이 남을 사건으로 사상과 행동이 일체 되는 본보기이다.

이회영(1867~1932)

1912년 만주에서 동포들의 결속과 조국 광복의 토대를 닦기 위하여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자 양성 기관으로 ‘신흥학교’를 설립하였다. 1924년 4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며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행했다. 이를 통하여 민족 진영 내의 잘못된 사상을 비판하여 독립운동을 정도로 이끌었다. 아울러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표방하는 볼셰비키 혁명 이론을 비판함으로써 공산주의와 대결했다. 보수 민족주의 세력의 권력 다툼에 비판적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 세력의 논리도 단연코 거부하였다. 그는 공산 독재 세력이 의식주 생활을 보장한다지만,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하루에 세 끼를 주는 감옥 생활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자유로운 마을 공동체의 자유연합을 원리로 민족해방을 도모했다. 이 원리는  전 세계로 확충될 것이라 믿었고, 이때 민족의 자주독립과  인류의 평화 번영이 함께 보장될 것으로 확신했다. 이회영의 일생은 중국 내 조선무정부주의운동 성장 과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민족주의 태 내에서 아나키즘의 성장, 사상의 성숙, 투쟁 의식 고양, 전투 체제로의 전환 등 전 과정이 우당의 생애에서 읽혀진다.


고드윈(1756~1836)


‘정치적 정의’란 저서로 아나키즘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1793년 프랑스혁명의 막이 내려질 때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드윈은 프랑스혁명의 진행을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혁명 세력들 속에서 탄생한 정치 권력이 도리어 혁명 운동이 발전을 가로막았다’ 고 지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 지식인 모두가 얼마나 기쁘게 정부의 소멸을 대망할 것인가! 정부는 인류의 사악함을 빚어내는 유일하고 영원한 원인이다. 온갖 해독을 지니고 있는 저 야만적 기관의 소멸을 얼마나 열렬히 기대할 것인가!"

프랑스혁명은  고드윈으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한 동기였다. 책의 내용을 독자들은 열광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놀라운 반응에 대하여 윌리엄·허즈릿트는, "명성이 창공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고드윈은 권력에 의존하는 모든 사회 제도를 거부했다. 그는 생산 기관의 자발적인 공유를 기반으로 권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나가자고 제안했다.


푸르동(1809~1865)


그는 자신이 자란 농촌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떠올리며 늘 향수에 젖었다. "나의 아버지 집에서 우리는 옥수수죽으로 아침을 먹고 점심은 감자, 저녁은 베이컨과 스프를 마셨다. 우리는 이처럼 채식만 했는데 살이 찌고 건강했다. 왜 그런지 아는가? 그것은 우리의 밭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우리 손으로 경작한 생산물로 생활했기 때문이다." 라고 술회하였다. 이처럼 검소하고 목가적인 농촌 생활이 그의 사상 배경이었다. ‘빈곤의 철학’이란 책에서 그는 ‘재산은 도적이다’ 라고 갈파했다.

푸루동은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극도로 높이자고 주장했다. 개인은 모든 노력의 출발점이자 궁극 목표이지만 어떤 개인도 고립되어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각자의 인격을 실현하고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인의 자유와 사회라는 전체 조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자유롭고 나 자신 외의 어떤 권위에도 따르지 않으며 사회라는 조직체는 단지 계약일 뿐이다. 이 계약은 협의 하에 해지될 수 있다."는 사고가 그의 공동체 의식이다. 즉 개인과 사회의 상호부조 논리이다.

푸루동은 프랑스를 열렬히 사랑하는 애국자인 동시에 정의의 신봉자였다. "오오! 나의 나라여  나의 프랑스여  영원히 혁명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나라여. 자라나는 자식이 어머니에게 품는 저 사무치는 정으로 부르니 나의 사랑하는 나라 프랑스여!" 라고, 조국 프랑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만약에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정의를 위하여 나의 조국을 버릴 수 있다."고 했다. 푸루동은 1848년 실패한 프랑스혁명에서 루이 블랑이 내세운 국가사회주의의 무력함과 공화국 정부가 범한 온갖 죄악을 지켜보았다. 이 경험을  토대로 ‘19세기 혁명의 일반적 이념’ 을 발표하여 국가를 폐지하고 아나키사회를 건설하자고 제창했다. 그는 아나키스트를 자칭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인데, 아나키는 반대파를 비방하는 경우에 사용했던 단어였다. 생산 수단을 점유(소유가 아니라)한 개인과 상호 신용의 계약으로 결합된 코뮨(commun, 공동체)의 연합을 구상했다.


바쿠닌(1814~1876)


그의 혁명 운동은 1840년대에 슬라브 민족주의자로서 시작된다. 당시 그의 관심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터어키와 같은 전제 군주의 지배 하에 있는 슬라브 민족의 운명이었다. 1848년 11월 1,800명의 폴란드 망명자가 참석한 파리 연회에서 타국의 지배 아래 신음하는 모든 슬라브인의 해방을 호소했다. 민족주의 시대의 주요한 문서인 ‘슬라브인에의 호소’에서 사회 문제와 민족 문제를 동시에 해방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민족해방운동과 사회혁명이 일체가 될 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고 단언하였다. 당시 슬라브 민족의 현실은 일제 지배 아래 있던 조선 민족의 상황과 차이가 없었다

1860년대로부터 그의 혁명 이론은 아나키즘으로 체계화되었다.  인터내셔널을 두고 마르크스와 논쟁을 전개하며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부동해졌다. 1867년 쥬네브에서 개최된 ‘평화와 자유를 위한 회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보편적인 평화는 현재의 중앙집권 국가가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다. 권위와 약탈에 의하여 위로부터 조직된 이들 강제 동맹의 폐허 위에, 코뮨의 자유로운 연합이 주와 나라와 유럽 연방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와 같이 밑으로부터 조직된 자유로운 연맹 건설을 위해서 우리는 이들 국가의 파괴를 추구해야 한다.”

바쿠닌은 생산 수단의 공유를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데, 분배에 대해서는 공동 소비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의 노동에 의하여 부의 생산에 기여한 정도까지 사회적 부의 분배에 참여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가 내세운 경제 생활의 원칙은 ‘능력에 따라 각인으로부터, 공적에 따라 각인에게’라고 요약할 수 있다. ‘능력에 따라 각인으로부터, 필요에 따라 각인에게’ 라는 완전한 공동주의(communism)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크로포트킨(1842~1921)


‘빵의 정복’ 에서 사회적인 부의 공동 소유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푸루동이나 바쿠닌과는 달리, 현대 산업사회에서 개인 별로 생산량을 정확히 산출할 수 없다는 견지에서 공동 소비를 생각했다. 공동소유 공동생산 공동소비의 원칙 아래 완전한 공동주의(communism)를 구상하였다. 널리 알려진 저서인 ‘상호부조’를 통해, 진화의 중요한 요인으로 상호부조가 윤리 개념의 참된 기초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은 미래사회의 전망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국가에 의해서 발생하고 또 강화되어 온 특권이 없어지는 날, 국가도 또한 그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릴 것이다. 일단 인간 관계가 착취자 대 피착취자의 관계이기를 그친다면, 전혀 새로운 사회 집단 형태가 생길 것이다. 부자가 빈자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더욱 부자가 되도록 짜여진 현존 기구가 무용해지는 날 생활은 아주 단순하게 될 것이다. 지역 결합에 의한 코뮨과 기능 별로 결집한 노동조합의 광범위한 연합은,  아나키스트가 구상하는 해방된 미래사회의 모습이다. 코뮨과 노동조합에 병행하여 개인 관계로 결합된 집단, 이를테면 다양한 종류의 목적을 충족시킬 필요에서 생기는 집합체가 여기에 첨가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결사는 이미 현재의 사회에서도 정치 단체 또는 직업 집단과 별도로 무수히 발생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의 10월 봉기에 참가했으며 그 가운데서 참된 혁명의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은 이미 볼셰비키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것은 혁명의 장송이다."라고 예언했다. 비밀 경찰은 아나키스트를 비롯한 볼세비키 외의 모든 사회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다행히 국제적인 명성과 신망 때문에 크로포트킨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레닌을 찾아가 볼세비키의 독재를 비판했다. 혁명 초기에 크로포트킨은  평등을 지향하며 노동의 각 분야에서 생산자가 직접 참가하는 소비에트 제도를 긍정했다. 그러나 점차 정치 체제가 독재화되자 소비에트는 결국 권력의 도구로 변질되었다고 개탄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준엄한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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