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柳致環 1908~1967) 경남 통영 출신 :


유치환(柳致環 1908~1967) 경남 통영 출신 :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생명력의 충일, 영원한 절대자유의 추구 등 아나키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그의 인류애적 사고는 시를 통하여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며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실존 방식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해방 뒤의 암울한 현실을 시를 통해 강렬하게 비판했다. 외세를 등에 업고 민족을 분열시키는 좌익과 우익을 ‘공산주의 신봉자들의 음모로 빚어낸 악착한 상쟁의 환멸’, ‘인민을 우롱하는 일부 집권배들에 대한 증오’로 표현하였다. 또한 부당한 정치권력에 저항하고 인간성의 주체적 자각을 통해 아나키즘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을 남성적 어조로 담아냈다. 독립노농당의 당원, 아나키스트로서의 사상적 토대를 이해할 때 그의 문학 전반에 걸친 정확한 해석이 비로소 가능하다. 그의 안의중학교 교장 취임은 시인으로서의 명성, 하기락(河岐洛)과의 친분 외에도 독립노농당의 당원이었기에 가능했다.

 


문덕수,『청마 유치환 평전』, 시문학사, 2004, 223쪽, 224쪽, 331쪽; 청마문학회,『청마탄신 100주년 기념문집-다시 읽는 유치환』, 시문학사, 2008, 527쪽; 김미선,「유치환 시 연구, 아나키즘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공주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2, 57쪽.


      * 김미선은 유치환이 어느 편당에도 적극적으로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우익을 다 같이 비판하고 있다고 했으나, 이는 유치환이 아나키즘 정당인 독립노농당 당원임을 알지 못했기에 일어난 오해이다. 

유치환이 경남 안의중학교 교장으로 재직(1952.11.10~1954.10.5.  문덕수,『청마 유치환 평전』, 시문학사, 2004, 202쪽, 203쪽, 209쪽 329쪽; 청마문학회,『청마탄신 100주년 기념문집-다시 읽는 유치환』, 시문학사, 2008, 526쪽)한 것은 하기락과의 친분뿐만이 아니라 독립노농당 당원이고 아나키스트였기 때문이다. 안의중학교는 경남 함양의 안의 지역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하여 설립한 학교이며, 초대 이사장인 아나키스트 이진언은 독립노농당의 창당 당시 문교부장이다.(김영천,「단주 유림과 독립노농당」,『아나키즘 학술대회 단주 유림의 사상과 독립노농당』,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2005, 58쪽.)

      * 아나키스트 유치환의 행적은 조선무정부주의운동사 편찬위원회,『한국아나키즘운동사[전편]』, 형설출판사, 1994(2쇄), 211쪽에도 언급되어 있다.

       유치환이 독립노농당 당원이라는 사실에 대해 독립노농당이 해산될 때까지 활동하였던 정인식(鄭仁植)은 의미 있는 증언을 하고 있다.(2008년 10월 1일, 서울 신림동, 한국정치사상연구소.) 유림이 청년당원인 정인식을 1950년대 후반 무렵 유치환에게 보냈다. 일면식도 없는 그를 유치환은 당에서 보낸 동지라며 특별히 맞이하였고 이러한 만남은 그 후에도 자주 있었다. 당시 경주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유치환은, 학생들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퇴근하여 정인식과 나이 차이를 떠나 어깨동무를 하고 목로주점을 전전했다. 그때마다 유치환은 정인식에게 ‘당가’를 부르자고 하여 둘이서 함께 부른 적이 많았다고 한다.

      * 유치환과 정인식이 불렀던 독립노농당 당가에 관해서는 독립노농당 활동을 한 인물들 사이에서 이견이 있다. 정인식, 김용관 등은 당가라고 주장하지만 이창근, 조국선 등은 동의하지 않는다.

      * 김용관은 당가에 관하여 특별한 증언을 하고 있다.(2006년 11월 1일, 서울 신림동, 한국정치사상연구소.) 4․19 전 어느 날 밤 김용관, 정태출, 임낙관, 오연환, 유성하, 한상섭, 유영봉, 고범준 등 청년당원들이 종로거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활보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당수 유림이 “자네들 당가를 부르며 종로를 돌아다녔다지!”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당시 이들이 불렀던 당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혁명을 찾아서 암초 많은 바다로

나중에는 감옥일까 기로틴의 앞으로

일어서라 노동자 농민과 여성들

불합리한 이 사회 그 제도를 부수자.”


      * 항일운동시기 독립운동가들이 불렀던 ‘혁명을 찾는 길’의 가사가 이와 유사하다.(최삼용,『20세기 중국 조선족 문학사료 전집』제4집(조선문), 연변인민출판사, 2003, 145쪽, 146쪽.) 즉 독립노농당 청년 당원들이 불렀던 이 노래는 구전 혁명 가요를 당가처럼 애창하며 부른 것이다. 다음은 ‘혁명을 찾는 길’의 가사이다.


암초를 물리치고 두렴 없이 혁명 찾아

감옥을 차버리고 앞으로만 내달린다.

어느 곳의 감옥을 내 집으로 정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가련다.


다수만 고생하고 소수만 복 누리니

고해에 허덕이는 그 설음이 어떠냐

일어나라 로동자 농민과 병사들

불평등한 이 사회 그 제도 까부시자.


      * 192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독립군들의 투쟁 가요 중 ‘혁명가’는 더욱 비슷하다. ‘혁명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김철균 채록,「항일가요와 황정일 할머니」,『www.zoglo.net』, 2011.)

혁명을 찾아서 암초 많은 바다로

감옥살이 두려우랴 혁명대열 앞으로

어느 곳의 감옥이 내집으로 되든지

단두대에 오른대도 겁날 것 없어라.


적은 무리 잘 살고 많은 대중 못사는

자본주의 노예된 그 설움이 원통해

일어나라 노동자 농민과 여성들

불평등한 자본사회 때려나 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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