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스트: 유림, 신채호, 박열과 금자문자, 이회영 & 고드윈,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


아나키스트: 유림, 신채호, 박열과 금자문자, 신채호, 이회영 & 고드윈, 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



유림(1898~1961)


한학을 배우던 17세 때 한일합병이 되자 ‘충군애국’ 네글자를 손가락을 끊어 혈서하여 조국광복에 헌신할 것을 맹세. 부흥회, 자강회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 ·1운동 당시 안동 지방의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 군사력을 준비할 목적으로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탈출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였다. 비밀특파원의 자격으로 국내에 두 번이나 입국하였다.

1925년에 중국 국립성도대학교 사범부 문과를 졸업한 후, 신디칼리스트의 광동의 의거, 무창폭동에 참여하였고 북경대 총장 채원배, 양계초, 임서 등과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 일대의 민족혁명 세력 규합에 주력하여 정의부 교육위원장으로 활동하였고, 1931년에 국내에서 광주 학생사건이 발생하자 이때 봉기한 4백여명의 학생을 모아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의성숙’을 창립 인재양성에 주력하다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사건으로 인해 체포되어 5년간 복역 후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다.

이 당시 대전 감옥에서 복역중 일제는 유림을 회유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일제는 유림의 외아들이 결핵에 걸려 요양하고 있음을 알고는 “유선생, 외아들이 폐병으로 다 죽어가고 있소. 앞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서약만 한다면, 외아들의 치료를 위해 유선생을 가석방시키도록 노력하겠소.”
“내 자식이 죽더라도 내가 출소하면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자식을 팔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선생이 밖에 나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편으로 독립운동을 안하겠다고 한마디만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비록 임시방편으로라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바른 말을 하고 여기서 죽을지언정, 거짓말을 하고 나갈 수는 없다.”

그 당시 대전 감옥의 간수는 유림의 민족해방과 인류평화의 열정에 감복하여 간수직을 그만두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고 전한다. 유림은 외아들 원식이 일본군 장교를 지냈다는 이유로, 부인도 자신이 독립운동하는 동안 외아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 일제의 앞잡이로 만들었다는 책망에서 물리치고 61년 4월 서거할 때까지 평생을 홀몸으로 지냈다. 유림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살기 위한 유림이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때문에 살고 있는 유림이다. 내가 가정에 얽매일 유림이냐?”
드높은 기개와 지조를 드러내는 일화이다.

1944년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우파 일색이던 임시정부가 좌우익 연합전선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았으며 임시헌장의 수정기초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46년에 경남 안의에서 ‘전국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 결과 아나키스트들이 주축이된 독립노농당이 창립되어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는 한국아나키스트들이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해나가겠다는 의지의 산물로서 세계 아나키즘 역사상 주목받는 역사적 사건이다.

1948년에 ‘통일독립운동자 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대표 간사로 피선되어 활동하였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 후 이승만 박사의 독재에 항거하여 투쟁하였다. 해방 후 그의 정치노선은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반외세, 반탁, 단독정부수립 반대, 남북협상 반대, 반독재투쟁 등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특히 반탁, 단독정부수립 반대를 하였으면서도 김구, 김규식 등의 남북협상을 반대한 것은 아나키즘의 입장에서 자주적 민족통일에의 열정과 함께 공산정권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결과였던 것이다. 이 부분은 한민당과 이승만 등의 수구세력과 박헌영 등의 공산주의 세력 및 여운형의 중도좌파 세력, 김규식 등의 중도우파 세력, 김구등의 보수적 민족주의 우파 세력과도 차별되는 점이다.
신탁통치에 대한 문서적 해석과 각 진영의 정치적 입장은 이데올로기 대논쟁으로 불러도 좋을 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장래에 어느 정파와 이념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평가와 의미가 달라질 것이다.

유림은 민족해방과 통일이라는 한국적 특수성과 모든 개인의 자발성에 기초하여 도덕적 자각과 상호연대에 의한 인류애의 실현이라는 보편성을 아우르므로써 아나키즘의 실천적 지평을 확장한 선구자이다.
아나키즘운동의 사상적 성찰과 대중과의 결합을 통하여 정치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운동을 한차원 끌어올린 세계 아나키즘 운동사에 있어서 걸출한 인물이다.

 

신채호(1880~1936)


어릴 때 한학을 배우고 19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황성신문의 논설위원, 이듬 해에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서자 전원위원회 위원장에 피선됐으나 사임하고 임정의 외교론, 준비론 위주의 노선에 반대하여 무력 투쟁을 주장하였다.
1919년 2월에 이승만이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의 위임통치를 요청하는 공한을 보낸 후 1919년 8월의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그를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신채호는 이에 실망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1932년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였는데 이는 민족 독립운동을 아나키즘의 원리로 관철할 것을 선언한 기념비적인 선언문이다.
‘조선혁명선언’은 우리 민족의 정치적 억압자, 경제적 착취자인 일본의 강제 권력에 대하여 명백히 적으로 간주하고 단호한 결전을 선포하고 있다. 아나키즘의 반강권주의적 면모가 여실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혁명선언’은 민족해방운동을 민중해방운동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혁명방법으로는 민중봉기와 파괴의 강조를 주장하였는데 이민족통치의 파괴, 특권계급의 파괴, 경제약탈제도의 파괴, 사회의 불평균의 파괴, 노예적 문화사상의 파괴를 설정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이 주장하는 파괴는 창조를 위한 정열이 전제되며 더 나은 상태로의 도약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박열(1902~납북)과 금자문자(1904~1926)


1923년 일본 황태자 살해 음모 사건으로 인하여 박열과 금자문자 부부는 1926년,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곧이어 천황의 특사로 감형을 받아 무기징역으로 복역 중 금자문자가 의문의 옥중사를 당한 사건으로 한국아나키스트 운동에 그 실천적 의미로서 큰 영향을 미쳤다.
옥중 결혼식을 올렸는지 여부와 그로 인한 옥중 임신설이 의문사의 원인이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희대의 사건으로 집권당이 반대당의 정략적 공격에 대응하여 그 원인 제거를 위해 금자문자의 교살을 사주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박열과 금자문자 부부는 그들이 조선의 예복을 입고 당당하게 재판정과 맞서는 법정 투쟁을 전개하였다. 공판정에서 일체의 죄인 대우를 하지 말 것, 조선옷을 입게 해 줄 것, 재판정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공판 시작 전에 자신의 선언문 낭독을 허락할 것을 요구하여 관철시켰으며 사형 언도를 받고도 박열은 “몸뚱이는 마음대로 죽이라, 그러나 나의 마음이야 어찌하는 수 있겠느냐” 하였고 금자문자 역시 “박열과 함께 죽는 것을 가장 만족히 아는 바이다”하며 시종일관 그들의 기개를 드높혔다.

박열과 금자문자의 투쟁은 아나키즘 운동사에 길이 남을 사건으로 사상과 행동이 일체되는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이회영(1867~1932)

1912년 만주에서 동포들의 결속과 조국광복의 물질적 정신적 토대를 닦기 위하여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자 양성기관으로 ‘신흥학교’를 설립하였다.
1924년 4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행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민족진영내의 잘못된 사상을 비판하여 독립운동을 정도로 이끌어가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를 표방하는 볼셰비키 혁명이론을 비판함으로써 공산주의와 대결해 나갔다. 보수적 민족주의 세력의 권력 다툼에 비판적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 세력의 논리에도 단연코 거부하였던 것이다.
우당은 공산 독재 세력이 의식주 생활을 보장한다지만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하루에 세끼를 골고루 나눠주는 감옥생활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자유로운 마을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들의 자유연합을 원리로 하는 사회조직에서 민족해방을 구했으며 이 원리는 한나라에 국한될 것이 아니라 장차 전 세계적 기구로 확충될 것이라 믿었다. 그래야 비로소 민족의 자주독립 뿐아니라 인류의 항구적 평화와 번영이 보장될 것으로 본 것이다.

우당의 일생은 중국에서의 조선무정부주의운동 성장과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민족주의 태내에서의 무정부주의의 성장, 사상적 성숙, 투쟁단계, 그리고 전투체제로의 전환등의 과정을 우당의 생애에서 읽어낼 수 있다.


고드윈(1756~1836)


‘정치적 정의’란 저서로 아나키즘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1793년 프랑스혁명의 막이 내려진 때 이 책이 나왔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드윈은 프랑스혁명의 진행을 주의깊게 지켜보면서 ‘혁명 세력들 속에서 탄생한 정치권력이 도리어 혁명운동이 발전할 길을 가로막았다’ 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다―‘인류의 벗인 지식인 전부가 얼마나 기쁘게 정부의 소멸을 대망할 것인가! 인류의 악덕을 빚어내는 유일하고 영원한 원인이요, 또한 그 본질과 결부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완전히 뿌리뽑지 않는 한 제거될 수 없는 온갖 해독을 지니고 있는 저 야만적 기관의 소멸을 얼마나 열렬히 대망할 것인가!’

프랑스혁명은 확실히 고드윈으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한 직접적 동기가 되었고 또한 그것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일 독자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책이 일으킨 놀라운 반응에 대하여 윌리엄·허즈릿트는 ‘명성이 창공에 찬연히 빛나고 있었다’ 고 표현하고 있다.

고드윈은 권력에 의존하는 모든 사회제도를 거부한다. 그는 생산기관의 자발적 공유에 바탕하여 권력을 최소한으로 축소시켜 나갈 것을 제안했다.


푸르동(1809~1865)


그가 자라난 농촌의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에 언제까지나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 집에서, 우리는 옥수수죽으로 아침을 먹고 점심은 감자, 저녁은 베이컨·스프를 마셨다. ----- 우리는 이처럼 채식만 했는데 살이 찌고 건강했다. 왜 그런지 아는가.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밭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우리 손으로 경작한 생산물로 생활했기 때문이다’ 라고 술회한다. 이처럼 검소하고 목가적인 농촌생활이 그의 사상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빈곤의 철학’이란 책에서 그는 ‘재산은 도적이다’ 라고 갈파했다. 까다로운 설명이 필요치 않다. 그저 한마디로 핵심을 찌르고 있다.

푸루동은 개인의 개성과 자유를 극도로 높일 것을 주장한다. 개인은 모든 노력의 출발점이자 궁극목표다. 그러나 어떤 개인도 고립해서 살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란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각자의 인격을 실현하고 충분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개체의 지존한 자유와 사회의 전체적 조직이란 이 이율배반적 양쪽편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자유롭고 내가 나 자신 이외의 여하한 권위에도 따르지 않고서 나 자신을 지배하기 위하여 사회라는 조직체는 계약이란 사상을 바탕으로해서 고쳐 세워져야 한다’ 고 한다. 이것이 그의 이른바 상호부조이다.

푸루동은 또 프랑스를 열렬히 사랑하는 애국자인 동시에 정의에 대한 성실한 신봉자였다.
´오오! 나의 나라여, 나의 프랑스여, 영원히 혁명을 노래하는 사람들의 나라여---자라나는 자식이 어머니에게 품는 저 사무치는 정으로 부르노니 나의 사랑하는 나라 프랑스여---’ 라고 조국 프랑스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숨기지 않았던 그였지만 ‘만약에 내가 둘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정의를 위하여 나의 조국을 버릴 수 있는 인간이다’라고 털어 놓을 수 있었다.

푸루동은 1848년의 실패한 프랑스혁명을 몸소 체험했다. 그는 루이·브랑의 국가사회주의의 무력함과 공화국 정부가 범한 온갖 죄악을 직접 지켜 봤다. 이 체험을 거쳐서 그는 ‘19세기에 있어서의 혁명의 일반적 이념’ 에서 국가를 폐지하고 ‘아나키’사회를 건설할 것을 제창했다. 그는 또 종래에 반대파를 비방하는 데 사용하던 ‘아나키’ 란 용어를 자기 자신의 호칭으로 받아들여 떳떳이 ‘나는 아나키스트이다’ 라고 자칭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이다.
푸루동은 생산수단을 점유(소유가 아니라)한 개인들과 그 작은 집단의 사회를 내다보면서, 각 개인에게 자기 자신의 생산물을 보장해 주는 교환을, 그리고 상호신용의 계약으로 결합된 코뮨(commun, 공동체)과 조합과의 대연합을 구상하고 있다.


바쿠닌(1814~1876)


파란중첩한 혁명운동의 경력은 1840년대에 슬라브민족주의자로서 시작된다. 이 때 그의 관심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터어키와 같은 전제군주들의 지배하에 있는 슬라브민족의 운명에 쏠리고 있었다. 1848년 11월 1800명의 폴란드망명자가 참석한 파리의 연회에서 타국의 지배 아래 신음하는 전슬라브인의 해방을 호소했다. 민족주의시대의 주요한 문서인 ‘슬라브인에의 호소’는 사회문제와 민족문제, 즉 민족을 대내 대외로 동시에 해방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일제 지배하에 있던 조선민족의 문제상황과 동질의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그는 민족해방운동은 사회혁명과 일체가 됨으로써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1860년대로부터 그의 혁명이론은 아나키즘으로 기울어졌고 인터내셔날에서 마르크스와의 논쟁을 통해서 그의 신념은 더욱 확고부동한 것으로 되었다. 1867년 쥬네브에서 개최된 ‘평화와 자유를 위한 회의’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보편적 평화는 현재의 중앙집권국가가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다. 권위와 약탈의 권리에 의하여 위로부터 조직된 이들 강제적 동맹의 폐허 위에, 코뮨의 자유로운 연합이 주로, 주의 자유로운 연합이 나라로, 나라의 자유로운 연합이 유럽연방으로, 이와같이 밑으로부터 조직된 자유로운 연맹이 나오기 위해서 우리는 이들 국가의 파괴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쿠닌은 생산수단의 공유를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데 분배에 대해서는 아직 공동소비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자기의 노동에 의하여 부의 생산에 기여한 정도까지 사회적 부의 분배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경제생활에 대한 원칙은 ‘능력에 따라 각인으로부터, 공적에 따라 각인에게’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능력에 따라 각인으로부터, 필요에 따라 각인에게’ 라는 완전한 공동주의(communism)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크로포트킨(1842~1921)


‘빵의 정복’ 이란 저서에서 사회적 부의 공동소유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푸루동이나 바쿠닌과는 달리 현대의 진보된 산업사회에 있어서는 개인별 생산량을 정확히 산출할 수 없다는 견지에서 공동소비를 이야기 하였다. 이리하여 공동소유, 공동생산, 공동소비의 원칙 아래 완전한 공동주의(communism)를 성립시켰다.
또한 널리 알려진 저서인 ‘상호부조’를 통해 진화의 중요한 요인중의 하나로서 상호부조의 법칙을 논하였으며 또한 상호부조가 윤리 개념의 참된 기초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의 아나르코 ·코뮤니즘은 미래사회의 비젼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국가에 의해서 발생하고 또 강화되어 온 특권이 없어지는 날 국가도 또한 그 존재이유를 잃어버릴 것이다. 일단 인간관계가 착취자 대 피착취자의 관계이기를 그친다면, 전혀 새로운 사회집단형태가 생길 것이다. 부자가 빈자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더욱 부자가 되도록 짜여진 현존기구가 무용해지는 날 생활은 아주 단순하게 될 것이다.
지역적 결합을 위한 독립된 코뮨 및 사회적 기능별로 결합한 노동조합의 광범한 연합이라는 이념은 아나키스트가 해방된 미래사회에서 실현될 조직을 구체적 현실적인 방식으로 구상하는 단서로 되었다. 다시 그 위에, 코뮨과 노동조합에 병행하여 개인적 관계로 결합된 집단, 이를테면 온갖 종류의 목적을 충족시킬 필요에서 생기는 무한히 다양한 일시적 또는 장기적 집합체가 여기에 첨가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결사는 이미 현재의 사회에서도 정치적 또는 직업적 집단과 별도로 무수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의 10월 봉기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서 참된 혁명의 가능성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은 이미 볼셰비키의 속셈을 간파하고 "이것은 혁명의 장송이다"라고 예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비밀경찰의 포악한 박해는 자파이외의 모든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들에게도 닥쳐왔다. 크로포트킨은 국제적으로 너무도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 자신에게 박해가 가하여지지는 않았지만, 볼세비키의 독재체제에 대해서 최대한의 항의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레닌을 직접 찾아가 그의 정책을 비판했으며 1920년 1월에는 서면으로 레닌의 인질행위를 준엄하게 규탄했다.

혁명의 몇가지 측면, 특히 경제적 평등을 지향하는 일대전진과 노동의 각 분야에서 생산자가 직접 참가하는 제도로서의 소비에트라는 독창적인 생각을 그는 찬양했다. 그러나 일단 정치적 독재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소비에트는 권력의 도구라는 부정적 기능으로 변질해 버렸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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